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천사를 만나서 의구심으로 시작했던 마리아의 심령은 순종으로 나아갔으며, 엘리사벳을 만남으로써 확신으로 가득 차 찬양하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순종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남자를 통하지 않고 아기가 생길 것이라는 의문점 가득한 메시지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믿음음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순종"을 가능케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죠. 게다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서 얻은 것이라고는 엘리사벳의 고백밖에는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가브리엘의 메시지과 엘리사벳의 찬양을 통해서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말이죠.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손길도 도저히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관성있는 실신하게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과 "그런 일관성을 유지하실 수 있는 전능하심"이겠습니다. 그리할 때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먼저 46-47절입니다.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가 이 과정 속에서 깨달은 바를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칭합니까? 48절에서 "여종의 비천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리아가 다윗왕가 유다지파 자손인데 목수 요셉과 결혼한 비천한 처지를 말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 맥락과 어울리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마리아는 가브리엘을 만나서 엘리사벳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매우 "영적으로 민감함"을 긍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현실적이고 육적인 환경을 말하는 것보다는 "죄인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겠습니다. 죽을 육신에 하나님이 임하신다고 하니, 비천한 자신의 육신이 하나님께 누추해 보임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임하겠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며 기뻐합니다.
여러분, 마리아에게 생기는 아기는 어쨌든 마리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길래야 여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자신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정황이 너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48절에서 "만세에 복이 있다" 모든 세대가 나를 두고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임을 고백합니다. 비천함을 말할 수 밖에 없던 자기자신이 이렇게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아기 예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죠. 그 능력에 대해서 49-55절과 같이 5가지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거나, 동행한다, 예배한다, 따른다 할 때에는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순종을 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모습 때문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하는 그 상황에서도, 또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하나 배워가게 됩니다. 마리아는 이번 일로 하나님에 대해 5가지를 알았고 그것을 노래했던 것이죠.
49절에 큰 일에 능하신 이라고 말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아기를 낳게 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두번째로 그 방법이 너무나도 독특하고 누구도 따라할 수 없기에 "거룩하신 분"으로 찬양합니다. 세번째는 긍휼하심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아기 예수를 통해서 "다윗 왕위를 이어받아 야곱의 집의 왕"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왕가는 망하지 않았다, 야곱의 집은 지금은 로마제국 압제 아래에 있지만 그들과 약속한 것은 잊혀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뤄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잊어버리면서 배반해왔지만 긍휼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계속 사랑으로 이어오셨던 것이지요. 그 사랑으로 세상권력으로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시니 마리아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네번째로 51절부터 보니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있는 자를 내리치심과 반대로 비천한 자를 높이시며 주린 자를 배불리셨고 부자는 빈손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나타나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했던 스스로 높아져 악한 자들을 내려가게 하셨고, 낮은 자리에서 비천하고 주린 자들을 높여주셨음을 노래합니다. 네, 하나님의 공의로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의 공의와 다릅니다. 세상의 공의는 모든 이들이 다 똑같은 출발선에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공의가 이것이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모든 인생을 꿰뚫어 보시고 마음까지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자신을 신으로 높였는지를 보십니다. 이스라엘 사회를 두고 말하는 마리아의 심령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마리아는 자기 개인에게 내려진 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이 속한 사회, 민족, 국가를 얼마나 아끼시는지까지 확장하여 보게 되는 "영적시야"가 생겼음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내려지는 은혜는 여러분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교회, 사회, 민족과 나라까지 돌보시는 증거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54-55절을 보니 기억과 영원이라는 단어가 독특합니다. 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항상 기억되어 영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한 일관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능력있지만 항상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여러신화에서 등장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다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