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10만원짜리 기기를 5개월 할부로 계약한 나는 다섯 달 동안 2만원의 지출은 나의 의지에서 떠났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만약 지출항목이 없어도 되는 기기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또 이런 필수항목이 누군가 만들어놓은 매커니즘이라면? 저자는 우리가 대부분 가지고 있는 빚-금융자본주의가 제공하는-이 어떻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옭아매고 과거에 함몰되어 살아가게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금융 지배 자본주의에서 과거가 가차 없는 요구가 되는 것은, 미래의 성과를 위한 과거의 목표가 종종 달성 불가능해 보이고 따라서 현재와 미래의 행동 가능성을 고도로 옥죄는 효과가 있는 것과도 상관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게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급변하는 오늘이라는 현실을 과거에 맺은 계약-이것이 금융부채이든 근로계약이든-안에서 유동성있게 대처할 수 있을까? 인격적이란 삶을 과연 과거의 계약이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젊은이들의 이직률이나 퇴사율이 높은 것은 그들의 끈기가 없어서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변화의 속도에 발맞춰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 직장생활로 집을 마련하고 자녀들의 대학을 책임질 수 있다는 인생주기와 변화에 맞는 고용임금과 지금 최저시급으로 6포시대를 살아가는 것을 비교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변동성과 우발적 환경을 주도적으로 또 합리적이고 인격적이면서도 유동성있게 대할 수 있는 계약을 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저자는 금융지배 자본주의는 우리가 비인격적인 계약을 맺게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고용에서 그 책임을 피고용자에게 넘기고 있다고 말한다.
"투자 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이 동일한 포스트포드주의 기법들은 일반적으로 인간 자본에 대해서도 이동성을 강요한다. 기계에게 요구하는 것을 사람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업들은 오직 한 종류의 전문성이나 기술만 가진 사람을 채옹하는 과거의 결정 때문에 미래의 생산에 제약을 받는 대신, 직원들에게 여러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즉 변화하는 생산 요건에 따라 자유자재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단순히 특정 기계를 다루는 방법뿐 아니라, 예방적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생산력에 변화를 주려면 부품을 어떻게 교체해야 하는지, 그러한 새롭게 가능해진 목적을 위해 그 기계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기계의 다중 작업은 노동자의 다중 작업과 짝을 이룬다......최초의 고객 주문에서 시작해 해당 노동자가 책임지는 작업 이전까지의 모든 생산 단계를 따라 진행되는 방식으로, 과거는 끊임없이 작동하고 피할 수 없으며 수그러들지 않는 압박의 성격을 띤다......노동자로부터 최대한의 고강도 노동을 뽑아내려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요구는 위에서 아래까지 공급 사슬 전체의 특징이 된다."
이즈음에서 나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출퇴근 거리가 1시간이 되는 자택에 있다고 보자. 그럼 나는 직장근무시간을 위해 2시간을 써야 한다. 그럼 이 시간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임금을 받기 위한 나를 위해 써야 하는 시간일까 아니면 근무를 대신 해주는(?) 기업이 책임져줘야 하는 시간일까? 이것은 노동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의 한 실제적인 예일 것이다. 때문에 한동안 최종연봉에 복리후생항목이 포함되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최근에는 버스기사들의 휴식시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법원의 판결도 있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악순환의 고리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기독교 관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스도의 속량은 곧 우리의 부채를 의미한다. 바울이 말했던 "빚진 자"다. 그 빚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채권자가 되게 했다. 그리고 그 빚은 점차적으로 줄여갈 수 있는 성경의 것이 아니기에 획기적인 탕감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우리가 과거와 죄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획기적이면서도 기이한 통화 혹은 보물이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자의식의 변화도 바라보게 한다.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와 단순히 연속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불연속적이지도 않은 채로, 우리의 과거 자아는 영원히 부인된 우리의 정체성일 것이다, 여전히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과거이며, 지속적인 탈동일시의 형태로 존재하는 나 자신, 우리가 끊임없이 맞서 싸우는 과거다......우리의 회심된 자아는 그 자체로 완벽성이라는 불가능한 기대 안에서 미래가 묶여 있는 과거와 같지 않다."
우리의 회심은 한 순간이 아니라 상태라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세례 이후에도 죄는 여전하다. 때문에 세례는 죄씻음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죄를 씻어낸 상태임과 동시에 앞으로 계속 이어질 죄와의 싸움에서 계속 씻게 될 상태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씻을 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부채를 지게 되고, 그것을 이미 탕감해주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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