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문화적 부수물은 단지 사후에 명분을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자본주의가 지시하는 행동을 이끌어 내고 방향을 설정하는 것을 돕는 실제적 지침이 된다. 따라서 나의 사익을 위해 거의 살인적 치열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유익하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나로 하여금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돌봐주지 않으리라는, 가차 없는 경제환경이 부추기는 믿음이다. (이런 종류의) 문화형식이 여기서 밝히려는 의미의 자본주의 정신이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OECD 상위에 해당한다는 기사는 익히 들어와서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이 지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자본주의 시대정신 앞에서 한국인들의 노동관은 어떠한 건지 해설해주는 것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다. 물론 행복지수라는 또 다른 지표를 가지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인들의 노동관이 왜 이리도 근면성실하면서도 속도전에 치이는지 이제는 해석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현재 한국의 가장 핫한 스타트업들의 노동에 관련된 사건사고가 계속 터지고 있는 이 시점에 말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베버 때의 자본주의와 현대 자본주의의 차이점을 밝히면서도 베버가 사용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대해서 정의하고자 한다. 일련의 개별현상에서 일관성을 찾아냄으로써 하나의 통일적 사고를 그려내고자 하는데, 한국 사회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위에서 말한 스타트업 외에도 네이버를 비롯한 IT기업의 살인적 근무형태, 노동의 가치가 사라진 상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금융업과 부동산 가치상승 등에 대한 현상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저자는 이번 장에서 자본주의정신이 가지려고 하는 믿음과 가치, 규범이 어떤 일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금융중심의 자본주의가 기존의 제조업 자본주의 순환구조와 어떻게 다른지 말해준다.
"생산을 통한 수익이 하락하는 것에 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체적 수익을 발생시키는 것은 재포장과 그렇게 재포장된 것이 거래되는 2차 시장의 존재, 그리고 이미 재포장된 것이 어떠한 명백한 제한도 받지 않고 다시 재포장될 수 있는 능력이다. 부채담보부증권이 수익을 내기 위해 경기 호황도 아닌데 수백만 채의 새 집이 건설될 필요는 없다. 단지 기존의 집들이 다시 사고 팔리거나, 그것이 부족하면 현 주택 소유자들이 다시 대출을 받으면 된다. 파생상품의 경우, 금융상품의 단순환 순환-재포장, 재판매-은 이러한 생황에서 돈-상품-돈-상품 판매를 통해 버는 돈이 아니라 돈-돈-돈이 직접 더 많은 돈을 버는 구조가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이런 역순환적 금융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정신이 객체들을 "훈육"한다고 표현한다. 기업은 더 이상 품질과 지역공동체를 통해 세워지기보다는 주주들의 배당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훈육되었다. 정부 또한 이동하는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세율을 낮춤으로써 국채를 발행함으로써 이에 대한 비용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로서의 의무된 사항들을 축소 또는 배제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의료와 교육이 이제 더이상 정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이 직접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로 인해 세입이 예상 이하로 떨어질 때, 정부 정책은 국채를 대량 구매할 능력이 있는 외국 투자자와 점점 더 소수가 되어 가는 부유한 자국민에 볼모로 잡히기 쉽니다. 다시 말해, 다수의 자국민의 이익과는 상충하는 쪽으로 정부 정책이 훈육되는 것이다." 이런 훈육의 일련의 과정은 마침내 개인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국가와 기업이라는 거대한 조직 앞에서 개인은 설 자리를 잃고 그나마 서있기 위해 부채 위에 서게 된다. 그렇게 개인은 빚 자체에 직접적으로 훈육되어져 간다. 아니 그렇게 구덩이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다.
"두려움 대신 일자리가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 바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직원들이 원하는 것이 그들을 고용한 기업이 원하는 것에 완벽하게 수렴되어야 한다. 여기가 윤리나 정신이 들어오는 지점이다. 그 근본에 있는 문제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부합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고용주가 원하는 것이 곧 당신이 원하는 것이자 당신 스스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을 이질적 세력에 의해 외부로부터 도입되어 억지로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현실을 위한 당신 자신의 개인적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주장을 위해 베버의 쇠우리(Iron cage)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큰 물주기가 흘러가니 개인의 배는 그 물줄기를 따라갈 수 밖에 없을 뿐이다. 대세가 그러하니까 말이다. 이번에 강남 배달오토바이 사망사건이 그러하지 않은가. 시간에 쫓기는 배달원이라는 의견에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항변, 그러나 더 큰 틀에서 보면 코로나19 속에서 경제건정성이 더 떨어져가는 중상층 구조를 살아내야 하는 수요자와 공급자 간의 대화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배달원, 사고를 낸 화물차 운전수, 배달을 시킨 주문자, 플랫폼을 만든 기업...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을까? 우리 모두 훈육당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내는 존재에서 무언가 한 순간으로 함몰되는 존재로 밀어넣는다.
"과거, 현재, 미래는 미래의 가치를 지향하는 2차 금융 시장에서도 서로에게로 함몰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현재의 가치는 전적으로 미래 가치에 대한 예상으로 결정된다. 현재의 가치는 그저 예측된 미래다.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가치가 어떨지는 현재의 기대에 의해 결정되고 그 안으로 함몰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차 시장에서 현재의 기대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된다. 모든 사람이 어떤 주식의 가치가 오르리라 예상하고 그것을 사면 주식 시장에서 그 주식의 가치는 실제로 오를 것이다. 이 모든 시간적 효과의 핵심은? 현재와 근원적으로 다른 어떤 미래도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일종의 자본주의 자체의 전체주의화다. 현재의 자본주의 구성 외부에는 어떤 미래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런 비인격적인 시간의 순환은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저자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1. 안녕할 권리와 일을 묶어 놓는 연결 고리 타파 2. 우리를 생산적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 타파 3. 현재의 자본주의 구성 방식 아래에서 창의적 가능성을 구속하는 시간의 연속성과 시간의 함몰 타파를 위한 개신교 반노동 윤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저자는 기독교의 구원은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전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성과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취한 것이 역전되게끔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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