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
19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오늘도 다시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담의 나무나라 왕세우기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담은 그 이야기의 해석과 결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요담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해서 말하며 지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세속의 원리,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노라고 비판을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16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여기서 요담은 "진실과 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이것은 마치 진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진실에 대해서 "내가 느끼고 결정한 것이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회적,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원수같이 대합니다. 의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편적이고 좀 더 객관적인 인간애에 가까운 법에 의한 의로움보다는 "내가 원하는 기준"을 의로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진실과 의로움이라는 단어를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결코 바뀌지 않는 진실과 의로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100년 안되는 인생을 가지고 수천수만년 동안 이어져온 이 지구에서의 삶과 자연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바뀔 수 없고, 탄생과 죽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100이 안된 인간의 과학의 발전은 이것들을 바꾸려고 합니다. 멋대로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과학의 발전이 100년 밖에 안되어서 이제서야 드러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악함이지만, 이것은 사실 인간이 존재했을때부터 보여왔던 악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악한 존재였습니다. 과학을 만나 이것이 극대화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극악무도해지는 인간에게 진실과 의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과 의로움의 왕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날에 그것들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세상은 각자가 왕이 된듯 살아가지만, 마지막날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에 근거한 의로움으로 말하시고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살아생전에도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진실과 의로움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요담이 그러합니다. 요담이 보기에 아비멜렉과 세겜은 기드온과 그의 집안에 대해서 배반에 가까운 행동을 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평화가 찾아왔던 것을 그들은 금새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7-18절입니다.
17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18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
은혜를 잊은 것 뿐만 아니라 기드온의 집안을 몰살시키고자 했던 아비멜렉을 추대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의한 행동인지에 대해서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의로움으로 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규모가 커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다른이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감사한 일이라고, 이것이 옳은 것, 의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기준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기준일까요?
물론 성공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겠습니다. 그런데 성공하기 위한 그 과정이 불의하고 더럽고 타락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과정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이것으로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19-21절입니다.
19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20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21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요담은 자신감있게 마무리짓습니다. 세겜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의로운 일이라면 기쁜 일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일이라면 서로를 죽이고 불사르게 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좋은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가, 나쁜 나무에게서 나쁜 열매가 맺어집니다. 좋고 나쁨은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기뻐하시고, 공의로움과 진실한 삶의 가치를 바라십니다. 그런 점에서 요담은 세겜과 아비멜렉의 행동이 불의하다는 판단아래 이런 결론을 맺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본문에서 살펴보겠지만 결국에 세겜과 아비멜렉은 서로 불신하여 싸우고 갈라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요담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계속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시 은혜주시어 오늘 우리에게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내가 성공보다 그 과정에서 의로울 수 있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맺게 해주시는 선하고 옳은 열매가 우리 삶 안에 가득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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