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당사자 곁에 지인이나 친구들은 안부를 물으며 "유감이다"라는 표현을 "I'm sorry"로 표현하곤 한다. 내 잘못이 아니기에 용서를 구할 일은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무언가 위로의 표현을 할 때 우리는 "송구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I'm sorry"라고 하는걸까. 정확한 어원이나 근거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유감을 표할 때 주어가 "I", 즉 일인칭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상대의 아픔이나 안타까운 상황을 함께 공유하는 차원에서 일인칭시점을 쓴다는 것이 나는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대사를 들을 때마다 좋은 표현이라 생각이 생각한다.
나의 지인을 위해 함께 하고자 하는 공동체의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민수기 32장에서 등장하는 3지파도 마찬가지다. 요단 동편을 기업으로 달라는 제안에 광야 1세대의 배역을 기억하던 모세는 깜짝 놀라지만, 서로 조율을 하며 함께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로 한다.
18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자신의 처자식과 재산 모두를 요단 동편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 전쟁터로 가는 가장들의 심정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 땅으로 전진하고자 했다. 자신과 상관이 앞으로 없을 그 땅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들은 나뉘어질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단 서편이 얻어져야 동편도 함께 얻어지는 것이다. 동편에서 진을 치고 있지만, 이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고구마 줄기를 빼야 고구마가 딸려올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 개인의 삶의 증진으로의 방향은 결코 풍요, 평안, 행복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수 없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가능하겠으나 사회적 동물이라는 우리의 근원적 존재론은 이 방향을 부정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이다. 시편 77편은 공동체 탄원시이다. 1인칭으로 시작하지만, 이는 인격적으로 시를 고백하는 한 개인이 공동체와 함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고백과 탄원이 공동체의 고백과 탄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함께 하나님께 호소할 것을 권면한다.
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존재는 함께하는 이들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운명으로만 나의 미래를 점칠 수 없다. 함께 하는 이들과 공유된 것들을 고려해야만 나의 미래를 그나마 더 정확하게 그려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인류공동체의 대표자로, 두번째 아담으로, 새로운 리더로 앞에 서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지존자의 오른손이 역사하실 때, 시기, 시대를 바라며 공동체를 향해 "I'm sorry"라고 말하며, 함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함께 망할 수도 있다. 공동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인일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선한 인생일지라도 말이다. 이사야 24장이다.
2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때에 모든 이는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을 잃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만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무엇이 다른지 밝히신다. 인간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길로 누굴 의지해야 할지 명명백백 밝히신다.
23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인간은 잘될 때나 망할 때나 앞으로 갈 때나 뒤로 갈 때나 결국은 같이 움직여지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잘 나간다고 결코 계속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와 섭리 앞에서 우리는 단지 한 팔 먼저 앞설 뿐이다. 뒤쳐진 자로 자신을 여기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공동체를 바라보며 뒤로 쳐져 "I'm sorry"로 함께 갈 이들과 어깨동무하는 이가 진정 앞서는 자가 아닐까. 복음의 확신이 있는 자만이, 이 심판의 끝에 하나님께서 다 밝히실 그 때가 올 것임을 믿는 자가 "I'm sorry"라고 말하며, 홀로 은밀한 곳에서 주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공동체를 위해 자기자신이 죄를 고백하고 중보하며 간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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