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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절기설교

사순절2. 주신 것을 바라보세요.

by 우루사야 2022. 3. 12.

 

 

 

본문 : 누가복음 15 25-32             
제목 : 주신 것을 바라보세요.

 

1. 서론

최고의 성숙도를 요구하는 말하기는 바로 "잡담"이라고 합니다. 쓸데없이 지껄이라는 말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옵니다. 잡담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흥미를 느낄 있는 주제를 꺼낼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눈빛과 , 단어선택을 복합적으로 판단하면서 상대가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하는지 함께 판단해야 하죠. 이렇게 잡담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잡담이야말로 인간성과 사회성이 응축되어 있는 가장 성숙한 말하기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진중한 의미에서 성숙함을 말해보죠.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미술관은 이번 러이사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러시아 폭격에 대해 전시된 예술품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이죠. 하나는 "일리야 레핀" 러시아 화가의 작품을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미술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 작가들의 그림을 우리가 구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아이러니일 뿐입니다. 이건 전쟁의 만행일 뿐입니다." 관장은 선대예술의 정신과 현대 러시아군의 만행을 구분할 아는 프로페셔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성숙함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후대에게 무언가를 물려주기도 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지켜내기도 합니다. 성숙함은 인생의 아이러니를 뛰어너머 소중한 것을 지켜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품꾼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휴머니티,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경제논리와 계산법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휴머니티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숙함이 결국 우리를 살린 것이었고, 지켜낸 것이었습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것은 고행과 수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휴머니티,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아는 시간이어야 하겠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우리교회의 평생표어구절로 삼아주신 요한복음 14:20 있지요. "20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에, 성령님이 오신 이날입니다. 날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를 우리가 알게 됩니다. 너희가 안에, 우리가 예수님과 형제가 되어 신의 자녀, 양자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너희 안에, 예수님이 인류의 대표로서 책임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성숙한 사랑을 아는 것이 우리가 지금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고, 깨달음이 주는 소망과 확신으로 우리는 이웃에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번 40주년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이 아시는 탕자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지난 품꾼 비유는 "하나님의 계산법" 대한 초대라면, 오늘 함께 나눌 탕자비유는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에 해당할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모습처럼 형도 그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듣는 이에게 소개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처럼 하라" 말씀하시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 이번 한주 동안 이웃을 사랑하시면서 부활절을 참되게 준비하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잃은 것을 찾은 아버지
오늘 본문이 되는 15장의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모든 세리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2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 같이 먹는다 하더라3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 이르시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면 "종교적 전문가"라고 말할 있죠. 사회적으로 저평가받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이들이 수군거리며 흠잡으려 하니 예수님이 무언가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들을 향해 3가지 비유이야기를 말해주십니다. 3가지 이야기 모두 가축 , 동전,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시 되찾게 됩니다. 4절을 보니 양을 잃었다가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합니다. 돈을 잃었다가 찾은 여인은 9절에서 "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말합니다. 탕자비유는 어떻습니까? 24절을 보니 "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말합니다. "종교전문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죄인이라고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들어와 죄를 사함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있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가지 이야기에 강조표현을 더하시어 하나님의 마음을 와닿을 있게끔 설명하십니다. 양을 잃다가 얻었을 때에 양치기는 양을 어떻게 인도합니까? 막대기를 들고 겁을 주면서 몰지요. 그런데 잃은 양을 향해 양치기는 어깨에 메고 옵니다. 마치 아기가 마냥 말이죠. 돈을 잃었던 여인은 어떻습니까? 돈을 잃었다가 찾았으면 마이너스에서 겨우 본전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마이너스 나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양치기가 양을 메고, 돈을 잃었던 자가 되찾자 잔치를 벌입니다. 자신이 죽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요구했던 탕자를 맞이하고 잔치를 엽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하루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사역을 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목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눠줄 것이 있어야 사역을 있다"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마음 바구니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사역을 하겠습니까? 준다고 내민 손이 달라는 손이 되어버리면 그건 삯군이 되어버립니다. 성도는 교회부흥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가 만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랑" 넘쳐나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올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입니다. 창조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 속죄의 십자가에서 보인 예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교통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안이 넘쳐나야 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이 우리 안에 감동과 은혜로 넘쳐나야 겠습니다. 세상은 돈이 없는 자에게 돼지쥐엄열매를 줍니다. 동물같이 대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계산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법은 어떤 아들이든 " 아들" 안아주십니다. 잃었던 가축을 아기처럼 안고 돌아옵니다. 잃은 돈을 가지고 잔치를 베풀고 나눕니다. 이것이 잃은 영혼을 바라는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계산법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비어있는채 전도하면 안됩니다. 그건 독입니다. 사랑이 없는 엄마가 아기를 가지는건 비극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번에 우리 공동체에 채웁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그날까지 사랑으로 준비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같이 찾아주기를, 같이 기뻐하기를
예수님은 비유 3개를 마무리 지으면서 잃어버렸다가 찾아 기뻐하는 이야기에 하나를 이야기해주십니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간의 대화였습니다. 25-27절입니다. 25맏아들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추는 소리를 듣고26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대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 잡았나이다 하니
아버지의 계산법은 아들을 있는 그대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갑작스런 잔치에 형은 어리둥절해 하다못해 분노하게 됩니다. 28-30절입니다.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 나와서 권한29아버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30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 잡으셨나이다

29절에 보니 아버지가 시킨대로 행하였지만 주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게 장남의 계산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언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급여를 주면 그건 아들이 아니라 종이지요. 그래서 31절과 같이 아버지는 말합니다. "31아버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첫째는 아버지가 장남의 위치가 아니라 "자신이 "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처음에 둘째가 아버지의 몫을 가지고 갔고, 나머지는 자신의 것인데 와서 둘째가 계속 쓰는 것이 아니꼽고 배알이 꼴렸던 겁니다. 그렇게보면 둘째만큼 못되먹은 첫째의 모습이 아닐 없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첫째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정확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32절입니다. "32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세상의 계산법으로 하자면 본래 첫째아들도 아버지가 없었다면 쥐엄열매나 먹어야 하는 홀연단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안에서 첫째 아들은 장남의 지위를 가지고 아버지가 주는 유산 안에서 풍성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모르느냐고, 충분히 명예롭고, 충분히 여유롭고, 충분히 다른 이를 사랑할 있는 자리인데 이리 인색하게 마음이 꼬여있느냐고 질타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잃은 아들, 죽었다가 살아난 너의 동생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계산법으로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종교 전문가들은 죄인들을 욕하며 수군거릴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품고 사랑하고 함께 하기에 지체하지 말아야 것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예수님은 표현하시며 "이런 삶을 살아내라" 말씀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집중하십시오. 금식과 수행으로 얻어내야 은혜를 찾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 속죄의 은혜, 동행의 은혜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들 안에서 충분히 누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이미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합니다. 충분히 풍요합니다.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빈궁한 것은 오히려 "나의 마음과 나의 의지"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잊은채로 "내가 일한 , 내가 헌신한 , 내가 이뤄낸 , 나의 본전" 생각하는 미성숙함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습대로 만드셨다면 이유를 기도가운데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이 주셨으니 가족으로 불평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세상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불평으로 가득 있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나에게 필요한지 고민해보십시오. 나의 지혜없음을 보시며 성령의 지혜를 구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나에게 주신 것들에 만족해야 우리는 서로 사랑할 있습니다. 

 

3)  성숙한 나를 향하여
저희 첫째 아들이 11살이고 둘째와 셋째가 7 5살입니다. 터울이 있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저희 부부가 첫째를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못되게 표현하면 잔심부름을 많이 시키죠. 그게 미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에게 드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금만 이해해주면 좋을텐데, 작은 장난감으로 싸울거리가 아닌데'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저희 부부가 어느날 사소한 문제로 티격태격할 때였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와서 저희에게 "싸우지 마세요" 그러는거 아닙니까? 저희 모두 도찐개찐이었나 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사람을 일렬로 세우면 사람 작은 사람 넓은 사람 좁은 사람 이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면 머리통만 보이니 거기서 거기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도찐개찐이에요. 잘나고 못날게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특별히 선택되고 독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귀한 알고, 교회가 귀한 알고, 은혜와 구원이 귀한 아는 ,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오히려 괴씸한 사람이 되겠죠. 20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세상계산법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계산법으로 다가서셨습니다.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아들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첫째아들은 장남으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같이 동생을 기다리다 못해 나가서 찾아봐주고, 챙겨주고, 함께 부둥켜 안아주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요? 그런데 형은 자기 계산만 하기 바빴던 겁니다. 그게 우리 모습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종교성을 가지고 삶을 윤택하게 하기만 바쁜게 우리 모습 아닙니까? 종교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으로 충족하는 삶은 결국 첫째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사랑으로, 휴머니티로,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가득 채워야 하겠습니다. 

2호선 합정역에 가면 양화진 선교사 묘역이 있지요. 거기에 5백여기의 묘지가 있는데, 선교사묘지는 15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누구의 것인고하니, 참전용사도 있고, 탄광부도 있고, 간호사도 있습니다. 근현대사에서 한국을 위해 평신도로 입국하여 섬긴 평신도들의 묘지였습니다. 묘지가 생길때인 1890년부터 1950년까지 60년간 관리해온 최봉임 장로님의 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비신자로써 선교사님들의 묘지관리인으로 채용되었지만, 나중에는 대표적 한국선교사로 유명하신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서교동교회의 최초장로가 됩니다. 작은예수들이 어떻게 한국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죽음을 불사하는지 직접 목격하며 죽은 선교사들을 묻어주는 삶은 가히 복음을 가장 가까이 체험하고 목격하는 아니었겠습니까? 게다가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가정은 4대에 걸쳐 한국복음사역에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셨을 제일 기특하게 보실 부활절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예수를 닮은 자들이 세상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모습아닐까요? 작은 예수들이 나타나 마치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으로 땅에서 살아가는 아니겠습니까? 우리 예수가 되려 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작은 예수들이 세계 곳곳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작은예수들 말이죠.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흥미가 없는 놀이기구를 아십니까? 그네, 미끄럼틀, 정글짐, 시소가 있지요. 이들 중에 3개는 직접적인 재미를 느낄 있는, 그러니까 힘을 사용해서 재미를 느낄 있는 것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타인과 함께 힘을 주고받아야 재미를 느낄 있는 겁니다. . 시소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소를 타다가도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힘으로 바로 즉각적인 재미를 느끼기보다 타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죠. 성숙해야 있는 놀이기구입니다. 

시소게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앙편이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세가 오락가락하는 접전의 양상을 말합니다. 이번 대선이 역대급 시소게임이었다고 말할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가지 중요한 지점을 캐치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분노와 증오의 대선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분노와 증오를 주고 받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비율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반반이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여기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민주주의는 서로 주고받는 의견을 통해 성장하지, 분노와 증오를 주고받아서는 정치는 후퇴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20대들의 상대이성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앞세워서 싸우고자 했던 대선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20 남녀가 싸웠고, 국민이 절반으로 나뉘어 싸웠씁니다. 우리 신자는 여기서 성숙함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앞으로 지방선거도 민족의 화합을 위해서 기도할 있어야 하겠죠.

우리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살라고. 탕자를 기다리고, 얼싸안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것에 함께 기뻐해달라고 말이죠. 지금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편에 계십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내야 삶은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어, 나라와 민족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아니겠습니까? 이웃을 기다리십시오. 이웃을 얼싸안으십시오. 그래서 우리도 이번 부활절에 이웃이 죽다 살아남에 하나님과 함께 기뻐할 있는 은혜를 먼저 받은 형의 모습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LOZE44qa-8&t=273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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