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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절기설교

사순절1. 버리고, 채우세요.

by 우루사야 2022. 3. 5.

 

 

 

본문 : 20 1-16       


1.
서론
오랜만에 뵙는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기도해주신 덕택에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아이들과 집에서 계속 함께 있으면서 생각할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부활절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부활절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기독교가 지키는 절기 가장 절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탄절보다 절기이죠. 그래서 우리는 세례와 성찬을 절기에 맞춰서 베풀기도 합니다. 절기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특히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피와 살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이라고 불리우는 절기를 부활절을 맞이하며 지키는데,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서 "고행, 수행" 지키는 시기로 알려져있습니다. 이유가 "기존신자"에게 맞춰져 있어서 그러합니다. 말이 무슨 말인가, 부활절에 성찬과 함께 세례가 같이 주어집니다. 성찬은 기존 신자가 참여하는 것이고, 세례는 새신자가 참여하는 예식이죠. 두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가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새신자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니, 세례보다 성찬에만 집중되기 시작했고 결과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고난, 수난" 성격만 강조하게 것이지요. 그래서 사순절하면 "금식"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부활의 주님을 맞이할 있을까요? 우리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이렇게 따라오라고 말이죠. (마태복음 16 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5누구든지 목숨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목숨을 잃는 고행과 수난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을 붙잡았을 우리가 처하게 되는 현실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수난당하고 계시는 현실이고, 현실을 살아냈을 때에 부활의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시며 나아가 가장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준비하는 사순절도 맞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사순절이 되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부활절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부활절까지 7주간 동안 "예수님의 역설"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세상의 원리는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으라" 것이었습니다. 원리에 대해서 숙고해보고자 합니다.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나의 계명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교회 전도지에 보면 1+0=100이고, 100-1=0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더하게 되면 가진 것이 없어도 100 되지만, 세상 온갖 것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가 빠지면 "0" 되는 것이죠. 이런 역설이 있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1차원의 원리로 살다가는 우리는 죽어가는 그들과 다를 없습니다. 역설적이며 신비하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논리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선물의 하나님

그런 점에서 오늘 함께 우리가 읽은 "포도원 품꾼 비유" 예수님의 역설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곳이다, ~~ 곳이다라고 설명하시기 보다 "인격적 존재" 설명하셨습니다. 1절입니다. "1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주인과 같으니" 여러분, 천국은 우리가 무언가를 얻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영혼이 충만해지는 곳이 바로 천국인 믿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설명하고자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2-5절입니다. 

 

2그가 하루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3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라4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5제육시와 제구시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살아가야 방향에 대해서 "천국"이라는 목표지점을 설정해주시고, 중간과정을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란 분이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고 말이죠.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일꾼은 업무시작 전에 불러야 이득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는 겁니다. 기회가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으로 불러들이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품꾼"이라는 틀을 마련하셨을까요? 우리의 "1차원적인 경제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부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우리의 효율성의 시각으로는 절대 세상을 똑바로 없다고 말씀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결정적인 장면이 6-7절입니다. 

 

6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있느냐7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유대인 시간개념에 6시간을 더하면 우리와 같습니다. 11시니까 17, 그러니까 오후 5시입니다. 일을 결산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간에도 부르시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시야입니다. 우리의 시야와는 너무나도 다를 밖에 없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이런 우리의 관념을 부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우리가 우리의 관념과 생각을 그대로 가진다면 예수님을 진정 만날 수가 없겠지요. 특히 3절을 볼까요? 예수님이 천국을 소개할 때에는 "3, 그러니까 9, 업무가 이미 시작한 시간에 남은 품꾼들은 택함을 받지 못한 비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의 시야로 택함을 받지 못한 이들을 부르시고 게다가 거기에 "상당하게 주리라" 약속까지 하십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은혜, 선물" 말합니다. 

비유를 조금 적극적으로 적용해보자면 "상당한 " 무엇입니까? 이들은 후에 나오겠지만, 자신이 일한 만큼이 아니라 주인이 주고 싶은 만큼을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고행, 수행, 사역, 희생을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다는 하나, 성령님이 동행하고 계시다는 하나.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생과 함께 하고 있다는 하나를 믿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상당한 " 아닙니까? 우리는 결코 나의 고행에 비례해 상을 주시는 자판기 하나님이 아니라 "상당한 선물"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 배알꼴리는 인간
우리 말을 보면 내장을 두고 말하는 표현법이 많습니다. 배알이 꼴리다, 아니꼽다 등이 그러합니다. 모두 내장이 뒤틀릴만큼 무언가가 언짢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표현들은 사실 긍정적이기 보다는 갈등의 관계나 부정적 관계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인데 오늘 본문에 어울리는 듯합니다. 8-9절입니다. "8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9제십일시에 자들이 와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보니까 우선 받는 순서가 가장 나중에 십일시에 자들에게 데나리온을 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의도를 엿볼 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가장 나중에 자들이 먼저 받는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의도한 바가 무엇입니까? 다음절 10-12절을 볼까요? "10먼저 자들이 와서 받을 알았더니 그들도  데나리온씩 받은지라11받은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12나중 사람들은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지 못해서 놀고 있었던 사실을 먼저 잊었습니다. 번째로 게다가 후히 주겠다는 주인의 호의도 잊었습니다. 오로지 먼저 1데나리온을 받은 자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주인의 호의, 자신이 일한 것에 대한 보편적 기준은 모두 사라지고 "경제관념에 따른 사고방식" 남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습성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끔 하시는 것이었던 거죠. 

 

본래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인과 약속한 내용 아닙니까? 게다가 그들이 함께 고려해야 했던 것은 주인의 호의였습니다. 그러나 변수가 생기자 마자 그들은 자신의 "욕심에 물든 계산법"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천국은 계산법으로는 만들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계산법, 일차원적인 계산법, 좋게말하면 인간의 경제관념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돈으로만 설명되는 가치와 관념으로는 결단코 천국을 이뤄낼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사순절에 해야 ,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 것은 수행, 고난, 고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으로 기뻐하고 있는지, 혹여나 주신 것에 반응하지 못하고 본문에 나타난 품꾼들처럼 다른 이가 받는 것을 기준으로 "나의 계산을 넣어 욕심" 부리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별세하신 이어령 선생님이 계십니다. 우리나라 문화부 장관이자 지식인으로서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주신 분이셨습니다. 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인터뷰에서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결국 휴머니티가 생명의 자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 부동산, 동기부여, 목적, 도덕, 진로가 원동력이라고 말하지만, 80 다된 노인은 그것들을 비우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라고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생명, 십자가가 살린 생명, 성령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는 나의 생명을 귀하게 아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비워야 채워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이고, 우리가 따라갈 예수님의 길입니다. 

 

3) 현실 속에서
예수님은 비유 끄트머리에서 결정적인 마디로 정리하고자 하십니다. 16절입니다. "16이와 같이 나중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자로서 나중 되리라" 비유 속에서 먼저 자들이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인의 호의를 먼저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를 나중에 받은 이들을 향해 배알이 꼴려하는 모습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먼저 택함을 받았을 뿐인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마치 자신의 훈장처럼 여기며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과 호의는 언제든지 바뀔 있다, 먼저 선택을 받았지만 가장 끄트머리로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경고하신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비유 후반부에 주인의 항변을 첨가하십니다. 13-15절입니다.

13
주인이 중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14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뜻이니라15 것을 가지고  뜻대로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은 잘못이 없으십니다. 인간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들의 잘못을 감당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다른 이에게도 이런 호의를 베푸느냐는 터무니 없는 말을 들으실 필요는 없으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너희가 받고 있는 호의"보다 선을 넘고 있는 너희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15 하반절에는 "내가 선하므로 악하게 보느냐"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계산법이 인간의 계산법과 다르다고 그것을 비판할 권한이 너희에게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계산법이 우리 안에 채워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휴머니티"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독생자를 내던지신 하나님의 휴머니티입니다. 휴머니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존재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품꾼들은 휴머니티를 잃어버리고 타인을 향한 비교의식과 세상의 계산법으로 가득차 있었던 겁니다. 이번 대선을 두고 "비호감대선"이라고들 말하지요. 내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후보가 아니라 후보가 싫어서 다른 이를 뽑는 유형, 미움과 증오의 유형의 시대가 것이지요. 분이 인터뷰에서 이런 기류를 두고 막스 베버의 말을 빌어서 "비생산적 흥분상태"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의 신념에 가득차 생산적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죠. 저는 품꾼들이 "자신만의 생각에 가득차 주인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련한 상태" 그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휴머니티가 있었다면 그들은 주인의 호의에 대한 감사와 함께 이웃품꾼들과 함께 나눌 있었을 겁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에게는 휴머니티가 내재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 여자대표팀은 포상금 15천만원을 4명이서 나누게 되었는데, 계주팀에 후보선수 1명이 있는데 선수가 준결승과 결승에서 뛰지 못해 포상금 명단에 못들었지만 함께 나누었다고 하죠.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린 러시아 병사에게 홍차와 빵을 제공하고 나아가 소년병사에게 영상통화로 어머니와 연결시켜주자 울먹거리며 통화하는 장면이 전해졌습니다. 지금 순간 누가 휴머니티를 가지고 승리한 자인지, 누가 자기신념에 가득차 비생산적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의 배반 속에서도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셨으며, 인간의 미련함을 인도하시기 위해 성령 하나님을 땅에 보내셨습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 휴머니티가 흐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당한 호의였고 선물이였고 은혜였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생각으로 하는 고행과 수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비움"으로 하나님의 휴머니티가 우리 안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가져서 우리 안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비어있는 우리에게 호의로 채워진 것도 모르고 욕심으로 채우려는 우리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먼저와 나중을 결정지으시는 하나님으로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 3-4,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수고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비우고, 사랑하기 위해서 나중이 되고,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4 부활절에는 우리의 사랑의 간증과 결과들이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K6DPvvJuE&t=46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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