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분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약해보입니다. 나약합니다.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의 모습과 지위는 우리를 책임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분은 "신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으신 만군의 주,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워집니다. 아기의 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우리의 분별력 없음과 섣부른 판단으로 인한 성급함, 세속적인 우리의 속마음이 들킨 것이 민망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를 감당하러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삶을 시작하실 때부터 죽으실때까지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시기까지 모두 "우리를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기억하며 보내야 제대로 보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서 9장은 우리에게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죄에 속박되어 도저히 서로 사랑할 수 없고, 항상 미움과 갈등만 가득했던 인류에게 "자유롭게 사랑하고, 서로 헌신할 수 있는 영적자유의 길"을 열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럽고 흑암이 가득했던,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항상 전쟁이 많았으며, 참상과 살육이 있었던, 치열했던 삶의 현장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 어둠과 멸시로 두셨지만, 이내 큰 빛을 보내시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매번 내 뜻과 내 방향, 방법, 타이밍으로 일하시지 않음을 잘 압니다. 왜 님은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왜 지금 안도와주시는지 불평과 불만이 쌓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이 과연 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때때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낮을대로 낮아지게끔 하십니다. 내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하십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회개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을 때, 더 내 자신을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로 비춰보아야 합니다. 내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지, 혹여나 다른 우상과 찌꺼기들로 쌓여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죠. 그제서야 나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고 "하나님의 빛과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깨닫게 되지요. 우리는 이렇게 죄의 속박을 벗어나 큰 빛이 주는 자유의 삶을 누리게 되는, 영화로운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가 주는 영화의 과정을 이사야는 3절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예수는 예수의 나라를 이 땅에 와서 만드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죄로부터 승리케 하셨습다.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즐거워하게 됩니다. 뿌리고 심고 돌본 것들에 대해 추수하는 기쁨과 즐거움, 결실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이 예수의 나라입니다. 우리 인생을 통해 일하시고 결과를 얻어내실 것입니다. 즐거움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 인생에서 예수의 나라를 만드셨을 때, 어떻게 어둠과 흑암이 사라지고 빛이 비춥니까? 이사야는 "군사용어와 전쟁묘사"로 우리 인생의 영적승리를 표현해줍니다. 4-5절입니다.
4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인생을 살아가며 지고가게 되는 책임과 멍에가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지고 가게 되는 걱정과 근심은 더 늘어갑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향해 더 채찍질을 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기억되려면 더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이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통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하십니다! 멍에, 압제, 채찍, 막대기와 같은 우리를 억압하고 번뇌케 하고 핍박하는 죄의 사망의 권세는 떠나갔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전쟁을 기드온 300용사와 미디안 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은 미디안이 "스스로 자기끼리 싸우게끔"하셨습니다. 새벽에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잠결에 나팔소리와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횃불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니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미디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정신없이 도망가고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판단하여 싸우며 결국 자멸하게 됩니다. 그렇게 미디안의 7년 압제가 끝납니다. (삿6-7장) 여기서 이사야는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그러니까 전쟁의 원리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뤄질 것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죄의 압제를 몰아내는 예수나라의 임함과 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과 예수의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에서의 헌신과 공로, 우리의 머리와 지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예수의 영이신 성령으로의 임재와 함께 동행하심. 그것으로 우리는 예수의 나라가 되고, 내 안에 주인이 바뀌며, 죄와 사단마귀 권세가 물러나가게 됩니다. 성령이 항상 우리에게 꺼지지 않는 불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밝혀주시며, 깨닫게 하시며, 더이상 미디안 군사처럼 이리저리 뒤뚱거리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 걷게 하십니다. 그 길에 승리와 기쁨, 추수와 결과에 대한 기쁨이 있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승리를 주시고 빛을 비춰주십니다. 성탄절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것에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6-7절에서 정리가 됩니다. 6절부터입니다.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 예수의 나라를 시작할 한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우리 인류 가운데서 우리의 몸과 같이 한 인간이 되게끔 하셨습니다." 아기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인류의 대표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도 "인간"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 그런데 그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입니다. 특별한 사람입니다. 독특한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사람이지만, 구별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피조물취급으로 끝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시고 영광을 나누기를 원하시고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마음이셨습니다. 성탄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정사를 메게끔" 그러니까 인류를 감당할 왕, 통치자라는 정사를 감당하게끔 하셨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래서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다른 무엇의 목적을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기묘자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분, 모사 지혜가 많아 우리 모두를 품어내실 수 있는 분, 전능하신 하나님 -신의 힘을 가지고 우리를 묶어내시고 인도하실 수 있는 분, 영존하시는 아버지 - 힘이 가득하시지만 아들을 품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품어내시는 분, 평강의 왕 - 모든 분쟁과 갈등을 풀어내시고 평온케 하시며 다스리어 모두를 부요하고 풍요하고 풍성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7절입니다.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후로 2000년 동안 그의 정사(왕권)은 더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예수 나라로 세워진 사람들은 더 평강의 사자들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왕이 되어 "샬롬"의 통치를 하며 샬로몬을 낳았듯이, 예수의 나라는 샬롬의 통치로 예수의 나라를 더 굳건하게 그리고 영원히 세워나갈 것입니다. 그 안에는 정의와 공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탄은 이것을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실재로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아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 세상의 나심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고 그 의미와 목적에 "하나님의 열심"이 있으며, 그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의 의지를 우리는 마음에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이 추운 겨울날 서로 사랑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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