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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강해설교/여호수아_가나안을 에덴으로

수 7:1-9

by 우루사야 2022. 1. 20.

1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6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여리고성의 정복을 마친 출애굽 2세대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요단강 건너기 전에 신명기라는 출애굽과정과 의미를 되새겼고,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넜으며, 유월절과 할례를 지켜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결과는 고대에서 가장 강하다는 여리고성을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무너뜨리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대신 싸워주신다는 사실을 눈으로 본 사건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게 됩니다. 2-4절입니다.

2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3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4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대결의 결말은 이스라엘의 패배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군사가 모두 간 것이 아니라 3천명밖에 가지 않아서라고 말이죠. 사실 이런 해석은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으로 정탐꾼을 보내 정보에 충실했고, 그는 이전 여리고성에서의 행보를 보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여호수아의 이런 결정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작은 성을 향해 전체 군사가 움직인다는 것이 무모해보입니다. 만약 "전체군사"가 움직여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이라면 요단강 동편에서부터 3지파도 다 따라왔어야 했습니다. 아이성 전투 이후에 가나안 땅을 분배하지 말고 전체가 전국을 돌면서 정복하는 것이 맞겠죠. 하지만 이후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해주며 각자가 정복해 나갈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이성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2-3천명만 동원되어서 그렇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럼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문맥을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제가 1절을 건너 뛰었습니다. 본문은 1절부터 "명확히 아이성 전투의 실패의 이유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온전히 바친 물건"은 무엇을 말합니까? 5장에서 무너진 여리고성에 들어가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을 진멸하고 나머지 은금동철과 같은 것들은 "여호와의 곳간"으로 들일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신 곳이기에 그것들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죠. 1절 하반절에 그 명확한 대상에 대해서 적시합니다. 유다지파의 아간이라는 자였습니다. 그가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으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셨다고 너무나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이성 전투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 다른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여호수아의 측근들은 2-3천명만 가도 승리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가장 최대치인 3천명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실패하고 말았죠. 원인이 다른데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거리, 하나님을 향한 존중,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계를 위한 우리의 존중"을 요구하십니다. 아담때에 하나님은 선악과로 관계를 표시하셨습니다. 지금 출애굽 2세대에게 선악과는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존중을 표시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이 더 듭니다. 아간 한 사람의 죄는 그 사람에게만 내려지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 전체의 패배로 이어지는가? 입니다. 여리고성 승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계약의 성취물이었습니다. 결코 한 사람과 하나님간의 계약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각자 개개인과 따로 관계를 맺으시고 교제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리고성 승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전체간의 계약이었기 때문에, 아간 한 사람의 범죄는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회사와 회사간의 거래에서 재무담당자들끼리만 연락해서 처리한다해도, 그것은 회사 전체간의 거래처럼 말이죠. 그래서 아간 한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전체간의 계약을 깨뜨려버린 것이 되었습니다. 그 심각성은 하나님의 임재처소를 침범한 것이었죠.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5-6절입니다. 

5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6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하나님에 대한 존중을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그 작은 아이성도 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36명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아이성전투에서 죽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심은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가르며 들어오는 것을 보며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은 여리고성과 가나안거민"처럼 된 것이죠. "어떤 강력한 힘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성경에는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제 생각에는 아간이 범죄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시었고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른채 하나님이 아직 함께 하신다는 헛된 믿음을 가지고 아이성을 향해 나아갔다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떠나시니 "강력한 벽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말이 본문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제까지 본문 속에서 "하나님이 여리고에 임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앞서 대신 싸우시겠다는 약속을 수도 없이 봐왔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아이성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의 떠나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존중, 경외를 원하십니다. 그걸 간단히 우리는 "믿음"이라고 표현하죠. 우리 심령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 현실에서 "대신 싸워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통해 천국을 만드시는 하나님,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는 놀라운 자리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주십니다. 이러한 축복이 떠나갔다는 사실을 안 여호수아는 참으로 비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군사만 수십만에 이르는 조직이었습니다. 아이성을 지금 다시 치러 올라가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반응은 엄청난 패배로 이스라엘 군사가 진멸당한 것 같이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전쟁의 패배로 인해 통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임재가 떠났다는 사실, 그래서 앞으로 가나안 정복 성취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비참해 하고 있습니다. 7-9절입니다. 

7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8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9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7절에 "어찌하여"라고 말하면서 "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시면서 요단을 건너게 하셨고, 이 전쟁터에 내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시니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저쪽에 있었다면 더 나았겠습니다. 이제 적들이 우리에게 몰려올텐데,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이 되는 이 순간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우리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대신 싸우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여호수아로서는 이렇게 생각하는게 맞겠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하나님과 함께 하실 때에 그 거대한 대적을 물리쳤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황폐"라는 뜻을 가진 너무나도 작은 아이성에도 이스라엘은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는 영적원리를 깨닫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명료하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동행"이 우리삶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금 화목케 하셨고, 마침내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예수가 재림하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맥락, 이 구속사 과정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 삶에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디를 가시든, 누구를 만나시든 "하나님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도외시 하는 처사가 결코 오늘 하루 내 언행에 있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며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그 현장 가운데 놀라운 역사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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