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강해설교/로마서_복음으로 사는 새로운 인생

롬 11:7-8

by 우루사야 2021. 9. 10.

 

 

본문. 로마서 11장 7-8절

제목. 택함과 고집

(개역개정) 7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8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1. 서론
1) 들어가기 
이번 주에 계속해서 로마서를 살펴보신 분들이나 함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가장 많이 들은 단어하면 "신비"일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우리의 영역을 벗어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동참시켜주시고, 우리를 통로로 삼아주시고, 우리도 그 유익함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오늘 그 신비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예화 
알쓸신잡이라는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낙서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왜 사람들은 표시를 내고 싶어할까? 누구 하트 누구, 누구야 사랑, 자기 이름 등을 낙서하거나 또 큰 바위에 쓰거나 아니면 이름을 새긴 자물쇠를 다리에 걸어놓기도 하죠.  왜 이러는 걸까요? 그래서 김영하 작가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불안정하니까..안정돼 보이는 곳에 새기는 거죠. 사랑도 불안정하고 자아도 불안정하잖아요." 정말 동의가 되더군요.
조금 더 종교적으로 가볼까요? 타종교를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잠시 예시를 들겠습니다. 불교 사찰에 가보면 초, 기왓장, 연등을 시보한 후에 그러니까 구매한 후에 거기에 자신의 이름과 소원을 써서 놓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불안정한 자신의 인생을 안정적인 존재에게 의지케 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과연 우리 개신교 문화에서는 없을까요?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 공동체로부터 인정받는 직분, 나의 신앙행위 그런 것들에 나를 안정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너무 불안정한 존재라 안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게 사랑이던 내 미래던 종교던 어쨌든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기대고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출생의 마땅한 이유와 죽음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신비한 구원을 주도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3) 주제
우리가 계속해서 나누는 이야기는 "하나님은 나를 택하셔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사람은 풍성함과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래서 전도가 저절로 됩니다. 헌신, 사명, 신앙증진, 부흥.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저절로 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자연스럽게 확신의 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내 힘으로 있다면 나는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확신이 없으니 다른 것에 의지합니다. 십일조, 헌금, 주일성수, 금연금초, 헌신 등으로 말이죠. 내 힘으로 존립하는 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 회심하지 않는 자, 예수를 피흘리게 한 못이 바로 나의 죄라는 것을 모르는 자에게는 결코 택함이라는 것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않는 교인은 신자가 아닙니다. 단지 교인입니다.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택함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내 힘으로 아직도 고집피우고 있어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혼미한 심령인지 말이죠. 그게 한국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은 계속해서 구원을 확인하며 살아가느냐, 아니면 구원과 상관없이 살아가느냐 두 갈림길에서 서성이게 됩니다. 그 서성이는 지점에 서있을 때 교회는 부흥합니다. 하나님! 내가 은혜로 사는 자인가요, 아니면 내 힘으로 사는 자인가요. 되묻고 하나님께 확신을 얻고, 또 세상염려로 흔들려 기도로 나아와 하나님께 묻고 다시 확신하며 나아가고... 그것이 신앙생활 아니겠습니까?! 이런 고민 있는 자들의 기도회가 어떨까요? 그러다가 택함을 확인한 자들의 찬양은 어떨까요? 부흥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 안에 있습니다. 

4) 본론잇기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해왔습니다. 이제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문단의 마지막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인의 우둔함, 쉽게 말해 미련함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이 미련함이 혹시 우리에게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미련함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1) 우둔함
우리의 미련함부터 생각해봅시다. 한 유튜버가 로또당첨자들을 찾아갔습니다. 한 명도 본인이 드러나지 않기를, 목소리까지 감춰지기를 바랬답니다. 당첨금을 탕진한 사람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나 같으면 당첨금을 얼마는 이렇게, 얼마는 저렇게, 얼마는 요롷게 쓸 것 같은데, 당신은 왜 그렇게 탕진했냐.' 대답하길 욕심이 불같이 일어나 쓰기 시작한답니다. 그 때 심정을 표현하는데 이 표현이 참 와닿았습니다. 본인이  187cm인데 2m 물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듯했다고 표현하더군요. 그런데 그 물 속에 들어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 떠밀었나요? 아니죠. 본인이 스스로 들어간 것입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한푼두푼 쓰다보니 이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생을 스스로 만들고 후회하더군요. 

한 신학자가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천국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라면, 지옥은 하나님께 멀리 떨어지는 것인데 다시 회복불가능한 낭떠러지로 스스로 떨어지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스스로 거절하여 날뛰다가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돌아오라고, 그 쪽이 아니라고, 아무리 부르고 사람을 보내고 어르고 달래고 혼도 내보지만 스스로 뛰어들어가는 웅덩이와 낭떠러지로 가는 것, 그것이 본인의 선택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본문에서 "우둔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7절입니다. 

 7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영어성경에는 hardened, 헬라어성경에는 "porow"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는 제자들에게 쓰였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겪었으면서도,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지 못해 혼비백산할 만큼 정신을 붙잡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빌려서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를 아무리 말해줘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 이 우둔함을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8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정신이 뭐에 씌워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멀쩡하게 보는대도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들었어도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 선지자, 성막 등을 통해서 계속해서 복음과 예수에 대해서 말해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겠다는 아둔하고 미련함"으로 말이죠.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사기범영화입니다. 마지막 대사가 이렇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상식보다 탐욕이 크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사람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탐욕이 상식을 잡아먹고, 그 탐욕은 점점 더 자신을 미련한 상황으로 내모는 것이죠. 조금만 더, 잠깐만 지나면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스스로의 판단에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사기 당하신 분들이 많이 하시는 이야기가 "뭐에 씌운듯했다."라는 표현입니다. 
구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이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수준의 종교생화을 통해 얻은 안정감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내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정도껏의 영적생활이 택함받은 증거다라고 말이죠. 뭐에 씌운 겁니까? "나의 주도권"이라는 것, 자기우상화에 씌운 겁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과 말씀은 없고, 오로지 나의 기준과 나의 입장만 가득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향해서 복음과 구원이 앞에 있어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왜입니까? 무언가에 홀려 있으니까, 사로잡혀 있으니까 귀한 구원과 은혜가 앞에 주어졌는데도, 앞에 낫을 놓고도 "ㄱ"도 못읽고, 소 귀에 경읽기 같다는 겁니다. 못보고 못들으니까요. 못 깨달으니까요. 이런 혼미한 심령을 가진 신자는 어떤 신앙생활을 합니까? 말씀을 들어도 기쁨이 없고, 예배는 매번 형식적입니다. 기도와 큐티는 나와 거리가 멀어진지 오래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지는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상태이시라면 스스로 돌아보셔야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가? 나는 진짜 신앙인인가?" 하나님이 정말 이렇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택함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듣지 않을 겁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심령의 부흥을 겪지 못하고 계십니까? 내가 신자인지 아니면 교인일뿐인지 확신이 안서십니까?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여지까지 해온 신앙이 가짜일까봐요? 왜 그게 가짜일까 걱정부터 하십니까? 내 힘으로 했으니까요. 하나님과 만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택함받은 자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니 속히 빨리 가십시오. 바울이 11절에 뭐라 했습니까? 넘어지기까지 실족, 완전 망했냐? 그럴 수 없다! 구원이 넘어간 것은 유대인이 시기하며 다시 구원에 대한 귀한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련함과 우둔함까지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가장 알맞는 회심과 회개의 시간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항상 우둔해지지 않고, 구원의 확신으로 차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세미한 음성
그럼 하나님께로 가기만 하면 우둔함이 어떻게 없어지는 것일까요? 듣게 되고 보게 되니, 우리의 심령이 혼미하지 않고 명확하고 확신있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구원사, 하나님의 말씀을 말이죠! 그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혼미해질대로 혼미해진 영혼으로 로뎀나무에 전전했던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건하여져서 승천하여 하나님께로 간 그 엘리야입니다. 그 이야기를 잠시 해드리겠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당시 왕은 아합왕이었습니다. 못된 왕이었기에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던 사람입니다.(왕상16:30,33) 그리고 그 땅에 가뭄이 들 것이라고 엘리야는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니 아합은 당연히 엘리야가 눈에 가시였고, 엘리야는 아합을 피해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서 바알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대결을 펼치겠다고 선언하고 대결은 이뤄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엘리야의 완승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모든 백성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엘리야는  850명을 몰살시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뭄이 그치는 큰 비가 내립니다. 모든 것이 원상복구가 된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이 방법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합왕은 이 갈멜산 대결을 아내 이세벨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왕하19:2) 그 소식을 들은 엘리야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무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 구렁텅이에서 나와야한다고, 가뭄이 계속되는 것은 당신들때문이라고 말해줘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결까지 보여줬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립니다. 도랑에 있던 물이 바짝 마르기까지 합니다. 그걸 아합왕은 봤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은 도저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엘리야 심정은 나락에 떨어지죠. 왜 이렇게 저 사람들은 우둔한 것일까. 안되는구나. 안되는구나.
그래서 도망가 로뎀나무라는 가시나무 아래 누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19:4)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하나님이 역사하셨는데, 왜 결론이 이렇게 날까요 주님. 우둔한 아합왕과 이세벨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실상 보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엘리야도 피차일반이라고 하나님이 이제 말씀해주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로뎀나무로 천사를 보내시어 그를 어루만지게 하셨고 먹게 하시면서 어디론가 데리고 가셨습니다. 40일길이었습니다.
시내산 또는 호렙산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이 출애굽 백성에게 율법의 말씀을 주셨던, 하나님의 기준을 주셨던,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후손대대로 안전을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있었던 그곳으로 엘리야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엘리야와 어떻게 대화를 하셨을까요? 열왕기상 19:9-12입니다 

9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는 와서도 하나님께 고자질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했던 것임을 아직도 몰랐던 것이죠.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엘리야를 깨닫게 해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거기에 여호와가 없었습니다. 지진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세미한 소리"가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인간에게 세미한, 조용히 부는 바람 소리로 역사하십니다. 그만한 힘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일깨우시고 불러일으키시고 다시금 일어서게끔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불을 내리고 지진으로 땅을 가르며 산을 부술 필요가 없습니다. 바알 선지자나 아세라 선지자와 하나님의 능력대결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흥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미하여 너무나도 약해보이는 말씀을 살아내는 삶. 그것으로 믿음의 선조들이 살아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나열하며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람의 왕, 북이스라엘의 왕의 교체를 지시하십니다. 또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부르게끔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북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다보다 더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든 구원의 길로 인도할 창조주요 구속주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세미해보이고, 약해보이고, 인간의 방법으로 안될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신비는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죠.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망해가는 북이스라엘에 엘리야를 비롯하여 7천명이라는 믿음의 남은 자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겁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세상과 힘의 대결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서 "말씀과 기도로 하는 영혼의 씨름"입니다. 나는 망했고, 나는 죄인이고, 내가 예수를 못밖은, 내가 예수를 부인한, 나 스스로 살 수 있다고 하나님 발등을 찍은게 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망한 나를 살려둘 방도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나도, 내 가족도, 내 이웃도, 이나라 이민족도 하나님의 손에 그렇게 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망할 것 같이 보이지만, 믿음의 눈을 보면 하나님은 그 속에서 기적과 반전의 구원의 역사를 쓰고 계신줄 믿습니다. 

 

3) 은밀한 곳에서 깨닫는 택함의 신비
여러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을 어떤 곳에서 만나라 하셨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입니다.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자주 쓰신 표현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은밀히를 다른 번역서들은 숨어서 보시는 영어 성경은 in secret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일대일의 관계,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독대"하는 관계라는 이미지는 공통적입니다. 엘리야가 40일 갔던 그 시내산에서 만난 하나님, 모세가 이스라엘 회중을 두고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한 후에 만난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세미한" 조용히 부는 바람소리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감격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무엇으로 갚으실까요?  

우리의 우둔한 정신과 시기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 무엇으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완고해질대로 굳어져버린 심성에 못되먹어서 남이 잘 될 꼴을 못보는 내 상태를 과연 누가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결국 은밀한 곳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나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뭐에 씌우지 않은 인생, 뭐에 홀리지 않은 인생, 죄와 사단에게 사기당하지 않은 제대로 된 인생!  내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앞으로 엎드리게 해야 합니다. 그 세미한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신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어, 우리가 혼미하지 않고 제대로 살아가게끔 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결론
1) 예화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가스라이팅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이 범죄는 목사라는 권위로 신자를 얽매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세미한 바람소리 같은 말씀을 깨닫게 하심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거짓선지자와 세상은 우리를 억누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풍요케 하고 자유케 합니다. 

2) 주제 
그래서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인지 나의 우둔과 시기로 가득찬 고집인지. 그래서 항복하고 하나님 계신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죄로 십자가에 박은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내 죄가 얼마나 큰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속량하신 예수님의 순종과 그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오늘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 내가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불안함으로 가득한 나와 우리네 인생, 그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굳건한 반석되시는 우리 주님,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을 또 마지막을 지금도 책임지고 계신 줄 믿습니다. 

3) 맺음
이번 한주 여러분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는 그 시간에, 은밀히 내 마음에 계시는 하나님과 만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택하심의 감격은 여러분이 행복하고 확신있게 오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합니다. 그 신비한 하나님과 행복한 한주를 보내시는 성도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D3iYgW8Mq4 

'강해설교 > 로마서_복음으로 사는 새로운 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롬 12:14-21  (0) 2021.09.13
롬 12:1-13  (0) 2021.09.12
롬 11:25 - 36  (0) 2021.09.10
롬 11: 13-24  (0) 2021.09.09
롬 11:1-6  (0) 2021.09.0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