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유월절 식탁을 통해 중요한 메시지들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거나 추상적으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포도주와 떡이 우리 몸으로 들어와 소화분해되어 영양분과 세포가 되어 나 자신과 하나가 되듯,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온전한 우리의 왕이요 대표자로써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가 나의 대표자면 그 예수를 따라 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예수를 원하지 않았나 봅니다. 다른 나라들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왕같은 대표자가 되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그 대표자를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겠죠. 24절부터 보겠습니다.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의 방향은 명확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내 이야기해오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권력가들은 시민 위에서 군림하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군림하였을뿐인데도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으려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운영되는 방식입니다. 누군가 위에서 군림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추앙할 수록 그 군림과 억압을 더 바라게 됩니다. 지금 전세계가 점점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하는 것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내가 억압을 좀 더 받더라도 잘 살게만 해준다면 상관없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전세계 곳곳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오히려 추앙을 받고 지지율이 높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우리 안에 폭력성과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본래 이것은 악한 무리들을 향해서 표출되어져야 할 의로운 분노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들었던 선악과의 뱀에게 내질러야 했던 아담의 진노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죄에게 패배한 우리는 그것을 또 다른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에게, 이웃민족에게, 옆나라에게 내뱉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런 점에서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는 전혀 다름을 말씀해주십니다. 26절에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말씀하시죠. 예수가 제자들을 섬겨오셨듯이, 제자들 또한 집권자나 은인이 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섬김의 다음은 무엇입니까? 28-30절입니다.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섬기는 자를 하나님은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는 이 지구가 끝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분명한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주조차도 끝이 어디인지, 그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가늠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라를 맡기셨는데,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썩어질 이 땅의 자리에 대해서 누가 큰지 싸우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다스리게 하자"라고 삼위하나님께서 모두 서로 약속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우리를 회복하셨다면, 우리가 최종적으로 변화되어질 모습은 "누군가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살펴봤듯이 이 세상의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27절을 다시 볼까요?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처럼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자리에 있되 다스리는 방법은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바라보며 그의 필요을 신경쓰며 그 영혼이 성장하는데 돕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31-34절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영혼을 위해 이렇게 해오셨습니다.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참으로 예수님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한 영혼 한 제자, 그의 마음과 성향을 바라보며 부르셨죠. 치유사역을 하실 때에도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앞으로의 장래를 바라보며 치유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베드로가 앞으로 당할 어려움에 대해서 준비하고자 하십니다. 첫번째로 사탄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주의였습니다. 밀을 채에 두고 흔들어 제끼듯 사탄은 베드로의 신앙을 뒤흔들려고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는 베드로를 향한 중보기도를 해오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실수하겠지만 다시금 제자공동체의 리더십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섣부른 호기로 각오를 밝히지만, 예수님은 더 자세하게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믿음이 떨어질 위기를 맞딱드리게 될 것인지 말씀해주십니다. 왜 예수는 이런 말씀을 하시며 또 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네, 섬기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군림하는 자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 처형을 하겠지만 예수는 베드로를 품어내고 계시는 것이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100세면 끝납니다. 그 이후의 삶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오늘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지금 누군가를 군림하면 편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를 따라 섬기며 하나님 앞에서 다스리는 자로 세워질 그 날을 기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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