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신 후입니다. 여리고에서 시간을 보내신 후에 이제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십니다. 양평에서 광진구까지의 거리.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면 도착할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그간 제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하시며 제자도가 무엇인지 밝히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종단하시며 전국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을 소개하셨습니다. 3년에 걸친 사역을 마무리짓고자 하십니다. 가장 마지막 사역,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고, 그 나라의 확장을 인류에게 인계하셨습니다. 화룡점정으로 예수는 법적으로 죄와 사망과 인류의 관계를 끊어내고자 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한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가 인류의 대표자가 되는 즉위식이 있어야 합니다. 28-32절입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예수는 얼마나 초라한 인생이었습니까. 아무도 챙겨주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의 초라한 즉위식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준비합니다. 다만 성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리하여 나귀새끼의 주인의 마음에 일하시어 나귀를 순순히 내어드리게끔 합니다. 여러분.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는 물론이거니와 예수를 알아본다 하더라도 예수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중적인 인생 속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내 주변에서 그 분은 일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은 기분으로 가득차게 만들어, 마침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관점"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재물과 욕망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시켜서 하지만, 지금 나귀를 끌어오는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이제 예수는 데리고 온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고자 하십니다. 35-40절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37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사람들은 나귀에 안장대신에 자신의 겉옷을 깔면서 왕을 환대합니다. 너무나도 단촐한 즉위식입니다. 옛 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니 무리들은 더 확신케 되었습니다. 예수야 말로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십자가로 인류를 구할 표본"이었습니다. 부활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영적분별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형제를 정죄하기 바쁩니다. 눈에 보이는 단적인 면만 보며 분별하려는 바리새인들의 깊이가 애처롭습니다. 낮은 자의 왕, 고난의 왕 예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웁니다. 41절부터입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는 진실된 왕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옳게 여김을 위해서 백성을 짓밟았습니다. 세리들은 동족들을 쥐어짜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경제적 우위를 누렸습니다. 헤롯왕가는 이스라엘과 동족이 아니면서도 어떻게든 왕위를 이어가려는 여우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진실로 위하는 리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며 웁니다. 예수는 눈물을 흘리시며 영적분별력을 갖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평화에 관한 일.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대표자로써 하나님이 보내셨고, 복음이 선포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였고, 인간이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죄, 병, 귀신을 이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교만과 오만 속에서 죽어가는 백성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네, 교만한 자에게는 복음과 은혜는 숨겨졌습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결국에는 심판이 임합니다.
네, 40년도 되지 않아 예루살렘은 마침내 로마군에게 정복당하고 성전과 성읍 자체가 파괴됩니다. 유대민족 자체가 말살당하게 됩니다. 500여년 전에 바벨론에게 끌려가 포로를 당했던 그 시절 속에서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500년 만에 이스라엘은 다시 멸망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그런 예루살렘, 은혜가 베풀어졌음에도 거절하여 스스로 탕자의 길을 걷는 그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오셨고, 들어오시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나 인류는 자신들을 학대하더라도 눈에 보기에 좋은 왕을 구합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기다리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 수난과 고통당하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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