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상 24장 1-7절
제목 : 마음의 찔림
1. 서론
1) 예화
열매가 맺을 때를 두고 ‘제철이다, ~철이다’라고 말하죠. 이 표현에서 파생되어, 인생의 열매를 맺을 때를 두고 “철이 들다”라고 말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생의 열매를 맺는게 뭔가 해서 “철들다”를 검색해보니 “사리분별을 할 수 있을 때”라고 사전에서 나오더군요.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생각할 줄 알 때라는 말이겠죠.
성경에서는 생각할 줄 아는 인생, 철이 드는 인생, 열매를 맺을 인생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줄까요? 잠언 1:22-23을 직역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자들아, 언제까지 너희들의 단순함을 사랑하려느냐?...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겠느냐?...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쏟아 부어 내 말을 너희가 깨닫도록 할 것이다” 성경도 철드는 인생은 "생각하고 깨닫는 인생”이라고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2) 주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인생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분별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성장을 포기하게 되지만, 분별하는 사람은 그 만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존재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생각하는 인생, 분별하는 인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3) 본문잇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무엘하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내용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떠도는 내용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곳곳에서 많은 변수들 속에서 생각하고 분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고자 “분별의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여전히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분별하지 않는” 원초적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자신의 탐욕과 분노, 초조, 시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 잠언기자의 표현을 빌어 “단순함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다스리는 자로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다윗과 같이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우리에게도 “분별의 훈련”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훈련의 고통이냐 후회의 고통이냐.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 가운데 주시는 분별의 훈련, 분별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다윗을 통해 배워, 훈련의 고통 후 성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철든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고민하지 않는 사울과 다윗의 측근
본문 1-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1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여전히 사울 근처에는 자신을 높이고자 무고한 다윗을 고발하는 자들이 넘쳤습니다. 사울이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윗의 목격담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의 행동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다윗 목격담을 듣고서 즉각 사울은 “정예병사 3천명”을 데리고 광야로 나갑니다.
저는 여기서 고민하지 않는 사울과 다윗을 고발한 어떤 한 사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두고 고민하거나 분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것이 기준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서 말하고 움직이고 결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들이 다윗의 곁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3-4a절입니다. “3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4a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이들은 하나님을 언급하기까지 합니다. 과연 이들은 옳게 분별한 것일까요?
여러분, 1900년대 최강대국 미국이 패배한 대표적 전쟁 2개가 베트남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입니다. 두 전쟁 모두 미국이 중도포기하거나 사실상 실패한 전쟁으로 불리우는데, 같은 실패원인으로 상대가 지형지물을 통해 게릴라전에 능통하다보니, 미국은 상대적으로도 뛰어난 무기들이 있어도 써보지도 못하고 실패한 것이죠. 그런데 광야가 꼭 그런 곳입니다. 숨으면 찾을 수가 없는 것이, 굴이 수백 수천개이고 산도 많고 골짜기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광야에서 한 굴을 택해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갔는데, 하필 거기에 다윗무리가 숨어있는 곳이라는 겁니다. 다윗의 무리들이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절호의 기회요 응답인 것입니다. 이렇게 분별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고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이니 마음대로 행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해석까지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그들의 의견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 명분까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말을 하나님이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들의 해석인 것입니다. 뒤에 보시겠지만, 다윗은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즉 이들의 해석은 제멋대로의 해석,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었을 뿐이었던 것이죠. 사울이나 다윗 곁에 있는 이들이나 자신을 높이기 위한 처사였던 것은 매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하나님을 언급했을 뿐 자기가 중심이 되어 분별하지 않고 말하고 선택한 것은 사울과 매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좋은 결정이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내렸는가? 무엇으로 그런 판단기준을 가졌는가? 라고 말이지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기 위해서 합리적 판단을 했다고, 고민하지 않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세가 모든 사람이 맞다고 말하니, 하나님뜻은 고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사울은 자신의 시기심을 그리고 다윗 곁에 있는 자들은 조급함을 가장 중심에 두고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 두부류의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2) 마음의 찔림
그렇다면 다윗은 어떤 분별을 보여줄까요? 다윗의 광야생활을 보다보면 하나님이 여러 가지 분별의 훈련장을 주십니다. 광야생활도 힘든데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과 싸우라고 하실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광야생활도 벅찬데 전쟁까지 하자는 말이냐고 되묻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한 번 더 찾아 온 것입니다. 위에서와 같이 대세의견은 수많은 동굴 중에 다윗에게 저절로 굴러들어온 기회 이니 사울을 처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계속해서 이런 훈련장을 주시며, 다윗에게 너는 어떻게할꺼니 물으시며 계속 분별하게끔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런 현장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분별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4b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5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대부분의 의견을 뒤로 한채 다윗은 다른 결정을 합니다. 사울을 죽이기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고, 애먼 사울의 겉옷을 잘라서 옵니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6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여기서 우리가 다윗의 행동 속에서 몇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다윗은 대세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분별함대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둘째, 대세 대신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하나님 중심의 사고기준을 마련했습니다. 셋째, 이런 하나님 중심의 기준은 수박겉핥기가 아니라 세밀한 영역까지 영향력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권위를 상징하는 겉옷, 하나님이 택한 사람의 겉옷을 자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질까 마음의 찔림을 가졌습니다. 넷째, 이런 기준을 가지고 다윗은 무리들에게 결코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의 중심에 두니 양심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양심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니, 행동의 기준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행동기준에 하나님이 계시니, 주변이웃들에게 제시하는 기준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는 한 사람의 분별하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한 순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대세의견들이 난무하는 그 현장에서 가만히 일어나 사울의 옷깃만 자르고 돌아온 것을 보십시오. 그가 고민하거나 상의를 하거나 번민하지 않았습니다. 갈림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우선순위가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갈림길에서 자신이 믿는 신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다가 돈 앞에서 무너집니다. 직분이 있을 정도로 교회에서 인정받지만 결정적일 때 인격의 미천함을 드러냅니다. 평소 이웃을 섬기며 평판이 좋다가도, 갈림길 앞에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왔던 자였습니다. 그것이 증명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이 분별하는 장을 계속 마딱들임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삶을 더 견고하게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사는 인생을 지금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어느 길이 맞는 길이냐 묻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생활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그 영역에서 하나님 안에서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사고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어떤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말자체가 “이 영역에서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 때에는 선택을 잠시 미뤄두고, 내가 고민하는 영역에 대해 하나님은 성경에서 어떻게 행해오셨는지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점점 다시 알아가며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답을 당연하게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별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변의 설득에 아무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탁월한 수를 두었던 것입니다. “4b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준비된 신앙은 갈림길에서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준비된 믿음이 승리합니다.
그렇게 분별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결정한 그 이후 어떻게 결말이 납니까? “17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라고 울며 통곡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울을 보게 됩니다. 아들도 딸도 신하들도 사무엘선지자까지도 악령까지도 말리지 못한 사울이었습니다. 무엇이 사울을 회개케 했습니까? 이웃의 선함과 사랑, 존경이었습니다.
다윗은 평범하고 또 평소를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특출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낮은 자리에서 훈련의 장을 계속 허락하셨고, 그럴때마다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오늘과 같이 하나님은 그가 더 강력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돈많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탁월한 통찰력이나 유서깊은 신앙명문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평범하고 일상을 살아내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모든 신자가 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었습니다. 평소 건강한 신앙이 있었기에 이런 갈림길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합당하게 실천하며 주변인들에게까지 자신의 의사와 의견을 전달했고, 사울까지 변화시킨 것이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땅을 다스리는 왕, 가정과 직장, 일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음을 믿으신다면 하나님을 평소에 고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성경은 “마음의 찔림”이라고 표현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 곳 마음에 머무르십니다. 이곳에 성령 하나님이 터를 잡으시고 우리와 연합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라는 영역에서 이뤄지는 생각, 의지, 판단, 결정, 느낌이 하나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만드신 성부 하나님으로 생각을 이어가고,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의지를 다잡으며, 내 죽음 이후에 부활의 길을 만들어주신 나의 형제된 예수를 기억하며 현실에서의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하고도 끝이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에서 알아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느 때에든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갈림길에서든 주저하지 않고 믿음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낼 수 있습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람은 무엇 또는 누구를 가장 닮을까요? 아버지 어머니나 가족일까요? 아니면 함께 생활하는 친구일까요? 또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멘토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가장 많이 닮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 삶의 여건이 바뀌기 때문이겠죠.
하나님은 여러분을 생각과 분별의 장으로 매번 초대하십니다. 이번 한주도 나의 생각과 분별이 하나님과 가장 가깝기를 바라며, 기도와 말씀이라는 분별력 훈련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예수의 인생과 더 닮아지고, 성령님에 대한 더 견고한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선함이 사울을 바꿨던 것처럼, 여러분의 선함으로 여러분의 이웃이 변화되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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