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삼상 16장 6-13절
제목 : 마주보는 하나님
1. 서론
1) 예화
자기마음을 볼 수 있도록 돕는 "마주보기"라는 시집에 있는 시 한 편을 읽어드리며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부지런히 일한 보람이 없을 때 읽는 시라고 하네요.
더 찬미받은 손도 있겠지요. 더 아름다운 손도 많겠지요. 그러나 여기있는 것은 세탁하는 손입니다. 손가락에 바르는 로션도, 손톱에 칠하는 메니큐도 모릅니다. 피아노 건반을 눌러본 일도 없습니다. 놀이를 위한 손이 아니고 세탁하기 위한 손입니다. 이 손은 서로서로를 세탁하고 다른 사람의 속옷들을 세탁하며 세상만사를 깨끗하게 만듭니다. 이 손에서는 라벤더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물냄새, 소금냄새가 납니다. 짜고 비비며 쉴새 없이 움직이고 궃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손입니다. 이 손은 빨갛게 충혈되고 터지기도 합니다. 더 찬미받은 손도 있겠지요. 더 아름다운 손도 많겠지요. 그러나 여기 있는 것은 세탁하는 손입니다.
1930년에 발간된 독일시집인데 지금까지도 공감이 되는듯 합니다. 내가 나의 일상을 보면 너무나도 평범해 이래도 되나 싶은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나만 이렇게 사는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함께 공감하게 되고, 나의 마음을 마주보게 해주니 참 좋은 시집이라 한권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2) 주제
제가 이 시를 낭독해드린 이유 중 하나가 평범함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그간 우상과 매듭짓기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우상들은 우리에게 좀 더 특별한 사람이 되라고, 좀 더 독특한 사람이 되야 한다고, 그렇게 특권을 얻어야 세상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상세우기에 열중하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계명에서나 요나를 보면 볼 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합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다윗을 향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시편에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자"라고 말할 정도로 성경에서 예수님을 표시해주는 대표적인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서 가장 첫번째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평범함"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처음으로 등장할 때 너무나도 평범해서 생긴일들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3) 본문잇기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의 위인들이라고 하면 독특한 헌신, 깊은 인격, 위대한 신앙가문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예수님을 가장 잘 대변해주며, 성령의 감동으로 가장 많은 시편을 쓴 사람하면 가장 평범한 다윗인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보면 특히 하나님은 이 다윗을 콕 집어 부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특권이 있고 독특하고 강한 자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극히 평범하여 누군가에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고 말하며, 특히 예수가 그렇게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가장 평범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지극히 평범한 내 인생을 어떻게 하나님이 사용하실런지 돌아보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평범하지 않았던 사울
지금 이 본문의 시기는 이스라엘이 왕정체제였을 시기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이 되는 시기로써, 누구를 세우느냐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라를 인도해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왕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써 하나님이 직접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변국들 정치체제와 같이 왕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었고, 가장 첫번째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 사울왕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왕이었어도 진짜 왕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16:26)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을 가장 우선시 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사울은 하나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우상숭배의 문화까지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진멸"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각왕과 좋은 가축과 물건들을 남겨둡니다. 그 전에는 전쟁 전에 사무엘과 제사를 드렸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가게 됩니다. 사울 안에 자기 자신을 가장 최우선시하는 우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길에서 되돌이키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울이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좀 더 성경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울에 대해서 말해주기를 "베냐민 지파에 유력한 사람 기스"가 있었고 그의 아들이 "사울"이라고 말해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고 말해줍니다.(삼상9:1-2) 그러니까 집안도 좋았고, 외모나 인물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마음이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이 왕으로 세울 때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21)라고 말했습니다. 후에 사무엘은 이 말을 기억하면서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15:17)라고 기억하며 말할 정도로 사울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로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왕이 되었다가 폐위가 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이어습니까? 자신을 높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울은 왜 자신을 높였습니까? 사무엘 대신에 제사를 드리려고 했을 때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삼상13:8) 자신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두려움은 사울이 믿는 존재가 누구인지 드러나게 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제사를 빨리 드려버리고 흩어지는 사람들을 모아 전쟁을 치르고자 했던 것이죠. 두 번째로 큰 실수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그는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15:9) 그래서 사무엘이 왜 그랬냐 하니 변명하기를 "하나님께 제사드리려 남겼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끝까지 자신의 기준,자신의 잣대,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세속적 기준과 물질을 우선시하는 자신의 기준을 하나님의 뜻보다 높였던 것입니다.
그는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남보다 특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쥐약이 되었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삼상18:8) 사울은 자신의 왕국, 자신의 세상, 자신이 주목받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평범한 자라 여겼던 사울이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특별했던 그는 하나님보다 더 특별한 자가 되려 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2) 평범했던 다윗
이 원리는 다윗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다윗을 선택하시고 사무엘에게 가서 이제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사울을 폐위시키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독특한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겸손한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이새의 집"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갔더니 7명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새는 사무엘에게 장자부터 소개합니다.
"6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용모와 키, 그러니까 다른 이보다 더 특별하고 독특한 사람을 보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용모를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키가 자라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은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용모와 키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항상 변할 수 있는 기준들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길 때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사무엘 조차도 사람의 기준으로 다음 왕을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의 초심도 바로 잡고자 8명의 왕 중에 누가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되는지 찾아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이었죠. 그렇게 하나님은 "중심", 그러니까 그의 인격, 성품, 생각, 성향 등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속사람"을 보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하셔서 갔는데 7명의 아들 모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11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12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결국에는 사무엘이 새로운 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기준을 맞추니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는 것이지요. 이새의 아들 7명을 차례로 보내면서 점점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일까 사무엘은 고민하면서 다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맞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의 속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사무엘은 마침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얼핏보면 이것도 외적기준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보십시오. 그의 빛이 붉다는 것은 혈색이 돈다는 의미로 마음에 생명력이 넘친다는 말입니다. 눈의 빼어남은 눈의 총명함으로 생각이 맑아 올바르게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있음을 말합니다.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낯빛을 말합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결코 낯빛이 밝을 수 없겠습니다. 후에 보겠지만 형제들까지도 다윗을 하대하고 무시하던 것이 이새가정의 분위기였습니다. 다윗은 말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건강하고 성숙했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높아지고자 했다면 절망하고, 낙망하고, 악에 받치고, 억울함으로 가득차 있었어야죠. 그랬다면 그는 이런 얼굴빛을 보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시 한구절을 볼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다윗은 하나님 한분으로 환경을 살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에게 하대받고, 아버지와 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가장 하찮은 일인 양치기 일을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어 하나님을 뵈옵는데,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보았던 다윗의 외모의 평가는 모두 속사람의 여부에 따라 비춰지는 외모를 의미합니다. 속사람이 건강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낯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 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옛말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자신의 속사람, 인격, 생각을 다스리라는 가르침일 겁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도, 다윗에게도 속사람을 판단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도 그것을 다시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마침내 다윗을 보며 속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어떤 자인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에게 무시받더라도 하나님만으로,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풀밭과 물가라는 환경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은 합당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에 특별하지 않고, 하나님께 특별한 자. 그는 자신의 평범함 속에서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살아갈 줄 아는 자였습니다.
3) 예수를 닮은 다윗, 예수를 닮을 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려면 권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높은 층에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서 누군가 우러러 보는 시선을 받으려면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시려면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해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계속해서 높아지기 위해 평생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르시스는 생전 처음 물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이 자신인 줄 모르고 물 속에 있는 그 존재를 사랑하다 물에 들어가 결국 죽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나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숨죽이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 자신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더 높이 세우려고 평생을 살아가다가 결국 나 자신이라는 우물에 빠져 죽어가는 인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예언 중 하나로 "건축가들이 버린 돌로 머릿돌로 삼으실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향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의 구속사를 이루실 것"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하나님의 이치가 서로 전혀 다르고 맞지 않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예수야 말로 가장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집안, 가문, 환경, 지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흠모할 만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렇게 가장 낮게 보내셔서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번에 민재가 반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룬 집안의 쾌거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재미집니다. 사실 민재가 3학년때 반장선거에 가서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편한 민재는 떨어졌다고 상처받고 그런 것은 없었는데 어쨌든 그 때는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압도적인 표차이로 붙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고 봤더니 함께 교회에서 생활하는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반장이 된 것이더군요. 저는 알지요. 민재가 친구들과 놀면서 어떻게 싸우고 대화하고 또는 섬기는지 말이죠. 아들이 반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이 살아가면 같이 살아가려 낮아지면 높아지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낮아지십시오. 그럼 하나님이 높여주실 것입니다. 저도 민재가 친구들과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것이 속이 타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빛을 발하라고 내버려둡니다. 제 안에 있는 예수와 복음이 민재 안에 있고, 그 예수를 제가 알려주어 그 친구들에게 전하면 되니까요.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벌써부터 학군 좋은 광장동으로 이사가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함께 낮아지고 함께 살아갈 수 있고 함께 살을 부대낄 수 있는 이곳이 민재에게 가장 좋은 학군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1층도, 나중에 지하도, 그리고 지금 본당에 있는 자모실도 점점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점점 바뀌어 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3. 결론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죠. 남들처럼 대학교가고, 남들처럼 직장잡고, 남들처럼 결혼하고, 남들처럼 애들 낳고, 남들처럼 노후보내다, 남들처럼 죽는 것.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겸손해보이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욕심이 들어있는 말인지 나이가 들 수록 점점 알게 되는 듯합니다. 우리는 평범함 속에서도 우리의 높아짐을 바라는 어쩔 수 없는 욕심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낮아질 때 어떻게 높이실 것인가 그 신비한 섭리를 믿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평범함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루하루의 반복의 일상을 보내면서도 매번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찬양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이번 한주도 세상보다 하나님께 특별해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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