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주보기02. 평소를 사는 다윗 본문 : 삼상 19:1-12
서론
1) 들어가기
22년 한가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한해와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항상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요즘 유행하는 엠비티아이 성격유형검사 이야기로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이 검사는 간단하게 사람의 성격을 분류해주는 것인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을 했습니다. 4자리가 있는데 각 자리마다 뜻이 있는데, 오늘은 그 두 번째 칸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합니다. 이 두번째 칸은 직관적인지 아니면 감각적인지를 말해주는 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현실주의자냐 이상주의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적히는 곳이지요. 이해하시기 쉽게 사례를 들어드리자면 어떤 한 사람과 갈등이 있었다고 보죠. 그런데 한 문장이 충격이었습니다. 직관형의 사람은 그 말을 정확하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합니다. 반대로 감각형의 사람은 그 말을 자기해석화 합니다. 그래서 그 때 했던 말과 나중에 기억하는 말이 조금 다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차이를 구분해서 보게끔 해주는 것이 엠비티아이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엠비티아이에서 지향하는 바와 같이 그 가운데 정점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건강한 것은 극단적이게 이것 저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적당히 현실적이면서 적당히 이상적인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이지요.
2) 주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만 바라보면서 현실을 무시하며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현실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천국을 잊은채로 살아가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심을 살아내라고 하셨고, 그것을 돕는 자로 성령 하나님을 우리 안에 보내주셨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그리고 가이사에게 낼 세금은 가이사에게 내라고 말씀하시며 두 존재의 왕 모두를 섬겨야 할 것을 말씀하셨죠.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양심, 지성에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을 증거하시기도 하시고, 현실에서 어떤 결정과 판단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알려주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신자는 하나 하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냄으로써 천국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이상과 현실 모두를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3) 본론과 잇기
우리는 지난 주에 시작하여 역사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 왕정시대 이스라엘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사울과 다윗을 세우셨던 하나님의 기준은 자기자신에 대해 겸손하게 여기는 평범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한 자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기자신에게 특별함이 없어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자,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한 자를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그것이 사울의 초창기 모습이었고 또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중에 오늘은 다윗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가 평범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이었다면, 오늘은 평소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큰 이벤트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평소의 일상을 귀중하게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이상을 바라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현실을 묵묵하게 살아갈 줄 아는 자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라는 이상이 현실이 되어서 그가 푸른초장과 맑은 시내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지요.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과 천국이라는 놀라운 이상이 우리의 현실에서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현실과 이상을 살았던 다윗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보는데, 예수님을 가장 잘 예표하는 자로서 성경이 말해주는 다윗은 큰 이벤트와 평소 일상이 혼재했던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아냈을까요? 지난 본문에서 다윗은 사울대신에 왕으로 대선지자 사무엘에게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사울왕도 포기한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그리고 물리쳤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사울은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다윗을 사위로 삼음과 동시에 다윗을 군대의 장군으로 삼아 전쟁을 시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번에 일약스타가 된 다윗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요즘 주식, 부동산, 코인 등 자산시장의 유동성이 너무나도 급격합니다. 모두가 꿈꿔왔던 자산의 규모를 한번에 벌어들인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런 자산을 한번에 잃은 사람들도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많은 사람들이 자산시장을 도박처럼 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수억원이 오갑니다. 유튜브와 개인방송채널들에서 1억원으로 수십억원을 벌어들인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순간에 수십억을 청산하게 된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혼동의 삶 속에서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다윗은 말 그대로 호황기 중에 호황기로 전성기가 시작되는 듯이 보입니다. 무시받던 다윗 자신의 삶에 쨍하고 해뜰날이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본문 7절을 보실까요? "7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사울에게 반기를 들거나 쿠데타 혁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레임덕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또 하나님이 자신을 세움을 사무엘이라는 공증할 수 있는 사람이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합니까? 사울 앞으로 갑니다. 그의 종이자, 사위이자, 수하의 장군의 자리로 다시 나아갑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릴까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될 것을 말했을 때에 다윗은 사울을 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의 하급공무원으로 들어갑니다. 사울이 악령으로 고생할 때에 신하의 추천을 받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하프와 같은 수금이라는 악기로 치유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윗을 고용합니다. 다윗은 순순히 그 자리로 들어갑니다. 자신이 앞으로 왕이 될 자라고 생각했다면 그 자리가 만족스러울까요? 나중에 등장하지만 사울은 수금을 쳐줬던 사람이 다윗이었던 사실도 모를 정도로, 이 자리는 하급공무원의 자리였습니다. 다윗은 이상을 바라보기 보다 자신의 현실 그 자리로 나아갔던 것이지요. 자신에게 맡겨진 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무시 속에서도 양치기 목동으로써 자신의 일상을 착실하게 살아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초장과 물가가 그 비천한 목동의 자리라면 그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보는듯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리가 참으로 힘드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자리를 피할 수 있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두 번째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군중들이 다윗을 칭송하기를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에게 확증도 받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군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자신을 우러러 보는듯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가정 안으로 들여 함께 식사하게 합니다. 그리고 신하들을 통해 사위를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빈곤하고 천한 사람인데, 당신들은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을 이렇게 가볍게 대하시오?"(왕상18:23) 다윗은 이벤트로 움직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을 살 줄 아는 자였습니다. 자신을 평범하게 대할 줄 알고, 평소의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던 그 다윗을 하나님은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울의 장남 요나단이라고 왜 왕이 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요나단도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심을 깨닫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돕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특별함과 이벤트로 분별하지 않습니다. 그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일상, 그 사람의 매일을 보고 알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무어라 표현합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6)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했던 시절을 버리시고, 사랑의 일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이나 다윗이나 하나님이라는 이상에만 취해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을 현실에서 살되, 그 방법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2) 우상과 이상만을 바랬던 사울
그렇다면 사울은 어떠했을까요?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이 폐위를 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은 회개하기보다, 즉 하나님과의 일상으로 돌아오기보다 자신이 그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나라에 대한 집착을 더 거세게 가지게 됩니다. 본문 6-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7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드니 요나단이 다윗을 변호하면서 그가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하니 사울이 그제서야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또 어떻게 바로 변심합니까? "8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다시 다윗이 전쟁에서 크게 이겨 다시 사람들이 환호를 하니, 사울은 질투와 번뇌가 가득차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겼는데, 그는 자신의 나라로 여기고 자신의 왕국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했던 맹세는 금새 잊어버리고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온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얼마나 세게 던졌던지 벽에 박히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게 현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라고요. 그런데 이 현실을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자신만의 왕국이라는 비현실적인 이상을 바랬던 사울의 생각 아니었습니까? 사울이야말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의문점을 가지게 되는 표현 한가지가 있습니다. 9절에서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이 말은 하나님이 악의 근원이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만을 우상으로 섬기고 최고로 높이던 사울에게 하나님은 그를 내버려 둠으로써 그가 재앙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기상태라고 하는데, 이런 상태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로 나아가기 때문에 당하기도 합니다. 또 로마서에 보니 바울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기는 잠시 잠깐의 유기입니다. 시험입니다. 왜요? 돌아오라구요. 하나님을 떠나면 이런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으니 돌아오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 유기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자기자신의 욕심으로 가득 찬 자들은 결국 영원한 유기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피하고자 하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셨으면서, 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시는 분이 말이죠? 그 아픔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유기상태로 간다는 것을 예수님은 관용적 표현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겪어보지 못한 아픔과 공허, 상실이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를 힘들게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당하게 될 지옥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소망과 목적이 없는 영원한 공허한 유기상태 말이죠. 지금 사울은 그런 상태의 전조현상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거기서 회개할 생각을 못하고 오로지 자신만의 왕국을 바라보니 결국 맹세를 어기고 다윗을 다시 죽이려고 들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평소를 살고 계십니까? 일상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벤트만을 바라보며 일상을 덧없어 보내는 삶을 사십니까? 그들에게 하루의 일용할 양식, 매일 티끌만치 쌓아져가는 인격은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상만을 바라봅니다. 씨앗을 뿌리지 못합니다. 매일매일을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자에게 그 미래는 결코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울은 지금 일어난 전쟁의 승리라는 현실에서도 자신의 왕국이라는 이상만을 바라보니, 그 승리를 위협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에서의 승리 속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게로 다시 나아갑니다. 현실을 살아내고자 합니다.
3. 적용 및 결론
그런 점에서 두가지 일화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지역사회에서 교회를 알리고자 올해 초에 한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 교회 예배당을 잘 꾸미고 사진도 찍고 해서 당근마켓에서 지역알리미에 올려봤습니다. 당근마켓이 중고거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소통하고 또 가게들이 홍보도 하는 곳이어서 교회를 소개해보고자 올려봤는데, 누군가가 제 게시물을 신고를 했다고 하더군요. 취지와 맞지 않는 글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사유를 한번 자세히 보았는데 게시물을 올리면 안되는 것으로 유흥업소, 술담배취급자, 대출업, 문신 시술, 짭퉁판매, 생명체 거래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집단이 같이 있었는데 정치단체하고 예로 무슨 당 시 의원회가 있었고 종교단체 하고 예로 무슨 교회라고 되어 있더군요. 동네 이웃들에게 소개하고자 했을 때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이런 곳은 안된다고 하는 이유는 불법적이거나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겠죠. 그런 점에서 교회가 과연 어떤 일상을 살아왔기에 이런 제제를 받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아원, 미혼모, 지역아동센터였다면 이런 제제를 받았겠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일상은 지역사회일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로지 자기자신만 생각하고, 불특정한 자들이 자신들만의 유익을 위해서 모이는 곳으로 인식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이상만을 바라보고 현실을 살아내지 못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게다가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려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분리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유기,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아닌지, 쓸데없는 소금을 버려 짓밟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다시금 생각나게 합니다.
이런 교회의 인식이니 코로나 때는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아는 많은 개척교회가 숨쉬기도 힘들어했습니다. 활동자체가 불가했으니까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교회는 번번히 더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방향을 수정해서 ~~아빠로 움직여봤습니다. 3명의 자녀가 있다보니 3명의 학부모로서 만날 수 있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지난 번에 7명의 4학년 아이들과 파자마파티를, 그리고 이번주에는 10명의 7살 아이들과 피자파티를 해봤습니다. 교회로 움직일 때에는 전혀 받지 못했던 환대와 환영, 감사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감사의 문자와 연락을, 간식을, 격려까지도 주시더군요. 이렇게 아이들에게 귀한 추억을 주어서 고맙다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세상은 공동체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구성을 위한 누군가의 섬김을 원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왔을까요? 교회의 부흥이라는 미명아래서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 평소의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사셨고, 또 그것을 위해 죽으셨듯이 말이죠. 구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섬김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할 자를 맡겨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섬겨야 합니다. 큰 예배당, 잘 갖춰진 시스템, 좋은 양육교재가 교회를 부흥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맡겨주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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