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은 맥체인성경읽기 156번째 신명기 9장, 시편 92편, 이사야 37장, 요한계시록 7장입니다. 개역개정4판, 현대인의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상류층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상류층이라는 말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기에, 하류층이 있어야한다. 다수의 하류층이 생길 수록 상류층의 지속성은 더 오래갈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몰락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때문에 상류층이 되려면 누군가가 하류층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만 끌어내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끌어내려 올라가 그 아래에 다수를 밝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류층이 된다. 내가 서울 도심 아파트를 사서 더 높은 매매가와 전세가를 책정함으로써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거나 지방으로 나가는 인구를 만들어야, 나의 아파트 가치는 더 지속이 될 것이다.
1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신9)
신명기 9장에서 이스라엘이 상대하게 될 대상에 대해서 모세는 분명하게 말한다. "너보다 강대한" 상류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할 상대들이다. 이스라엘 그대로를 보면 미약한 존재일뿐이다. 그뿐만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리신다.
24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신9)
이스라엘 자체로만 보면 대내외적으로 평가가 그렇게 좋지 못하다. 고대사에서 역사에 남을만한 꺼리가 없다. 게다가 문명의 혜택을 수여받았을 뿐이지 자체적인 문화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주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 도 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그것을 기억해야만한다고 경고한다.
4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5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6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9)
물론 상류층에 가기 위한 방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다보면 그 도구가 상류층이 될 수도 있고 하류층이 될 수도 있다. 선지자들의 인생을 보면 그러하지 않은가. 인간의 힘으로 상류층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제한적이다. 결론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지속성있고 성숙한 인생과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가문을 만들고 싶다. 자녀들과 함께 자자손손 대대로 신앙의 명가를 만들고 싶다. 그럼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인터넷에 보면 유학명가, 의사명가, 판사명가 등을 보게 된다. 나는 목사명가를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신앙명가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의 돌림자도 "맑을 재",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라고 지어줬다. 나의 공의, 정직함, 순결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아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9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15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92)
이 시편을 읽으면서 후반부 전체를 가져왔다. 모세가 이 시편을 읽었다면 아마 신명기 오늘 본문을 설명할 때 인용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사람은 환경이 중요하다. 주변 밭이 중요하다. 그 밭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정도니까. 모세나 오늘 시편저자나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뜰"에 있으라 말해준다. 뻣뻣한 나무 질이 좋지 않은 식목일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좋은 나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무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 밭이 좋기 때문이다.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8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29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사39)
36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37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38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 (사39)
이 세계는 하나님의 밭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밭을 가시기도 하시고, 들어 엎으시기도 하시고, 비료를 주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나의 힘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밭에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아야 한다. 식물이 내리는 비가 아니라 땅에 적신 수분을 흡수하듯이 말이다. 여호와의 열심은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살아있게 하시고 존재케 하시고 그리고 영광돌리게끔 하실 것이다.
13그때 장로 한 사람이 나에게 "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14내가 모른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큰 고난을 겪었고 어린 양의 피로 옷을 희게 씻은 사람들입니다.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밤낮 성전에서 그분을 섬깁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 위에 천막을 펴실 것이며16그들은 다시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해나 그 어떤 열기에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17이것은 보좌 가운데 계시는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계7)
어떤 이들은 과연 천국이 의미가 있는지 말한다. 지금 일백년을 사는 것도 지겨운데, 과연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도였다. 이에 어떤 이가 대답하길 이 세상에서 한 가지 기술 마스터하기도 바쁜데, 천국에서 모든 기술을 마스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대답이다. 우문우답이다. 천국에 대해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C. S. 루이스는 내세와 현세를 맛으로 비유를 들었다.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천상의 맛이 있기 때문에 같은 단맛이라 하더라도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숙대입구 앞에서 여대생들이 최고로 꼽은 그린애플맛 마카롱을 먹어보고 내가 알던 단맛과 같은 단맛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단맛이라고 같은 표현을 쓰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맛이었다. 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천국에서의 기쁨도 그러하다. 요한이 보았던 천국에서 사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보호받고 생명샘에서 사는,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주시는 위로 안에서 사는 삶이다. 그것을 부모, 스승의 사랑과 빗댈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차원일 것이리라. 물론 긍정적으로 말이다.
하나님 밭에서 살고 싶다. 그래야 내 인생에 의미가 생기고, 미래가 생기고, 이유가 생긴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삶으로 나타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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