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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제자양육/1단계 새신자_신과 함께_구속사

5과 신인_젊은이예배용

by 우루사야 2025. 4. 27.

제목 : 신인, 신이 된 인간
본문 : 벧전 2장 19절

1. 서론
1) 예화
제임스 클리어. 야구지망생이었던 고교시절 얼굴뼈가 30조각 난 사고를 당하지만, 포기가 아닌 성장을 택합니다. 다만 1%씩 성장하자는 다짐을 합니다. 그 결과 건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6년 후 전미대학대표가 됩니다. 이런 그의 극복스토리를 듣고자 NBA, NFL, MLB, 페이스북, 구글, 아이비리그에서 강연초청을 받게 되어, 그는 전세계에서 유명한 자기계발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강의를 하게 됩니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은 일시적인 아주 큰 영향력이 아니라 “1%라는 작은걸음의 일상화”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오래전부터 습관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다이어트, 금연, 성경1독, 미라클모닝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대부분이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습관이 되지 않은 행동과 목표들은 쉽게 포기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습관이 된 행동들은 많은 의지력이 없어도 되죠. 훈련을 습관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흥민, 김연아. 어려서부터 힘든 훈련을 어떻게 감당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두 사람이 같은 대답을 줍니다.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는 거지.” 네, 이 사람들에게 훈련은 “습관이자 일상”이었습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듯이 살아있다면 해야 하는 행동으로 그들은 훈련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훈련은 삶이 되어 하나하나 쌓아왔던 것이죠.

2) 주제
저는 신앙이야말로 큰 의지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야말로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많은 의지력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 된다면 신앙은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을 겁니다. 말씀을 들어서 명쾌해지거나 찬양이 감동이 되거나 기도하면서 내 마음에서 무언가 찌릿한 것이 느껴지는 것들은 매번 있는 것이 아니기에 습관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무언가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무어라 말해줄까요?

"신이 되라!" 굉장히 급진적이고 과격한 문장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이 주장이 성경에 나와있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단지 신을 추앙하기 위해 이 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신에게 도움만 바라면서 사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라면 위에서 말한 감동, 명쾌함, 짜릿함으로도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는 더 고차원적이고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것에는 수많은 고통과 갈등, 복잡함, 오묘함, 신비한 희노애락이 복합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신으로 부고자 하시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시죠.

 


2. 본론
1) 신이라고 불리우는 인간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82:6) 예수님은 말씀을 근거로 “인간인 나는 신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맥락은 전제가 붙어요.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2) 판단하는 사람들, 즉 재판관을 말합니다. 모세이야기를 한번 꺼내보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7:1) 모세를 신과 같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전제가 붙어요, 누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때라고 되어 있나요? 네, 바로입니다. 바로에게 옳고 그름을 말하는 역할에 대해서 “신”이라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럼 여러분이 더 잘 아실 이야기를 살펴보죠. 창세기에서 선악과, 선과 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가 등장합니다. 이나무에 대해 뱀과 하와가 대화를 나눕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사탄은 선악과를 먹어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탄말이 맞아요.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에요. 6절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봤습니다. 네,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고, 사탄은 그 길로 하와를 유혹했던 겁니다. 하와는 먹음직스러워서 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려 했습니다.

제가 지금 몇가지 구절을 드린 곳은 창세기, 출애굽기, 요한복음, 시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책들이며 신약과 구약을 넘나들죠. 성경은 내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까? 인간을 신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죠.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인간을 신으로 부를 때 함께 등장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시편은 다른 이를 재판하는 자에게 신, 지존자의 아들 그러니까 신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 서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판단케 했을 때 신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와가 신이 되는 것도 “선과 악”이 무엇인지,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할 때 신 또는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신이 된다고 상상한다면 브루스올마이티를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영향력을 끼치며 선과 악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대리로 이 땅에 옮기는 것”, 하나님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진정한 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그 자리를 위임받은 자들의 이야기와 그 자리를 배반한 자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등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정점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며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기도하며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우리 모두의 자리, 신
네, 신과 같이 되는 것은 일부 상류층과 엘리트 법관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또 성경 속 신화와 같은 인물처럼 느껴지는 아담과 하와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땅에서 이뤄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우리가 하게 될 대화를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누가복음에서는 이 비유에 “고을을 다스리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대를 넘는 자들은 모두 “신의 자리에서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 하나님이 아담을 처음에 창조하실 때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물고기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우리 모두는 먼지로 지어졌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써 다스리는 신이 되게끔 계획을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을 향해 이런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그리고 뒤에 명령을 함께 줍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19) 그리스도인이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내비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렇게 신성하게 성스럽게 살아가라고 하실 때에는 어떤 초능력을 발휘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마지막심판을 너머 신의 자리에 어울리는 자가 되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며 주변에 빛을 비추는 .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미래에 내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다스리는 자가 되어 누리게 모습입니다. 다스린다는 동사 자체가 우리의 경험의 축적과 이성적 사고, 그리고 전인적인 감정이 하나로 융합되는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정말 명확하고 실재적인 기준휘몰아치는 감정과 갈등, 변수, 악함속에서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전인적 행동인 것입니다. 단순한 꼼수로 살아낼 있는 동사가 아닙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가 있고, 교회에 다닌 다는 것은 이런 방향으로의 참여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서두로 돌아가보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교회에 다닌다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큰 의지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배우고 습득하고 인정하고 믿으며 점점 신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렇게 신을 닮아가며 신이 되어가며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써 세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살아지는 인생이자 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3) 섬김이라는 다스림
그렇다면 교회의 활동도 자연스러워 합니다. 특히 전도가 그래야 합니다. 전도는 선물을 주기 위해 초대하는 것으로 대체되어서는 안됩니다. 행사를 하기 위해서 자리를 채우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그런 것들로 하나님의 계획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전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 신의 직무”를 알려주고, 또 그렇게 삶에서 먼저 살아낼 수 있도록 응원과 용기를 주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성경공부, 성경세미나, 부흥회도 좋지만 더 근원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빛을 비추라고 표현합니다.

제가 지역사회를 섬기면서 일년에 한번씩은 굉장한 어려움에 처했던 같습니다. 올해는 인근초등학교 교장교감선생님을 만나야 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가는 길에 저절로 불평과 불만이 쏟아지더군요. 그런데 가는 중반 즈음에 기도의 마음이 일어나더니화평의 다리가 놓아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걷게 하셨습니다. 결과 학교에서 광진구청에 협조공문을 보내 인력을 보내주는 선하고도 신비하고 신기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학교측에서 교회측에 서서 학부모들에게 설명을 하겠다는 의견도 듣게 되었습니다. 내일 광진경찰서 청소년과의 협조도 얻게 되어 면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곳 땅을 섬김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흥케 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번듯한 사례를 받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그런걸로 하나님이 갚아주시지는 않는 같습니다. 오히려하나님의 섬김으로 주변을 다스리는 신의 자리 배우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또는 동성애자를 품는 것이라는 흑백논리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좌파와 우파 어디가 기독교에 가까운지를 설명하기 위한 용도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그처럼 쉽게 또는 너무나도 단순화시키는 기준으로 매몰시킬 없습니다. 고귀하고 신비롭고 고차원적인 기준이어야만 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신을 닮은 자들이며, 신이 일을 위임받은 신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섬김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섬김처럼 말이죠.



3.
결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낮은 자리로 가서 사랑과 섬김으로 나아갈 자리는 바로신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예수님이 하셨던 자리입니다. 후임자를 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자리에 응답하십시오. 섬기십시오. 어느샌가 신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유업을 받기에 충분한 후계자, 하나님의 우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곳에 앉아 우주를 다스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하나님을 닮아가는 습관으로, 신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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