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제자양육/1단계 새신자_신과 함께_구속사

2과 신_젊은이예배 설교용

by 우루사야 2025. 3. 5.

제목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본문 : 갈 2장 20절

1. 서론
지난 시간에 신비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교회에 왜 다녀야 하는가? 교회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내가 신비에 관심이 없다면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교회에서 다닐 이유를 찾고 싶으면 신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신비 중 가장 정점에 있는 것부터 살펴보아야 하겠죠. “신”입니다. 네, 오늘은 신에 대해 살펴보죠. 특히 신과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신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신과 얼마만큼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교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과 신앙상담이나 대화를 하게되면 받는 느낌이 있습니다. 신을 인정하지만 중요성이 그닥 떨어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을 인정하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옆집동네 아저씨, 나를 숙주로 삼아서 나를 조종하려고 하는 기생충. 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대인관계에 접목해보시죠. 가족, 동료, 친구, 이웃. 그 어느 관계에서도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관계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요. 

그렇다면 성경은 무어라고 말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문을 알려주시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는 태어나면서 내가 태어난 광경을 목격하지도 또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내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됨을 믿습니다. 눈으로 보지 못했고 기억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어머니와의 시간, 경험, 교류를 통해 내 어머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나를 만든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같은 창조주 신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신을 보지 않았음에도 신과 올바른 관계와 만남, 교류를 통해서 신이 나를 만든 창조주임을 믿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보릿자루건, 동네 아저씨건, 기생충이건. 교회에 다니는 우리 또한 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며 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이 되다보면,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정쩡하게 설정해놓고 신앙생활을 지속하다보면 결국 아무런 변화도 없는 이 생활이 무감각해지고 무미건조해지며, 나중에는 습관화되어 결국 신앙생활에서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다닐 이유를 못찾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은 왜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 두번째 시간, 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잠깐 언급해드린 신을 성경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죠.



2. 본론
1) 신의 위치
첫번째, 신을 동네 아저씨처럼 두는 이신론자들입니다. 이들은 신의 존재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음을 인정하지만 그 이후 신의 개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수많은 태엽시계를 만들어 돌려놓고 전혀 개입하지 않는 시계공처럼 말이죠. 집에 대소사가 생겼는데 옆집 동네아저씨가 끼어듭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말하죠. “아저씨가 뭔데요?!” 우리는 아저씨에게 대하듯 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뭔데요. 좀 내버려 두세요. 알아서 할께요. 저에게도 자유가 있어요.” 우리는 평소에 찬양도 하고 설교도 듣지만, 결정적일 때에는 절대 낄 수 없는 동네 아저씨처럼 하나님과 선을 긋고 거리를 두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적당한 거리를 설정해놓고 접근을 금지시킵니다. 내가 설정해놓은 예배횟수, 내가 설정해놓은 헌금액, 내가 설정해놓은 은혜받아야 하는 정도, 내가 설정해놓은 교회와의 관계 등으로 말이죠. 이렇게 거리를 두는 신앙은 하나님이 마련해놓은 신비보단 내가 이용하고픈 정도에 좌지우지 됩니다. 내가 기독교에서 내가 선호하는 재료들만 가지고 나와 내 방식대로 만들어놓은 요리를 만들어 먹는 꼴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비한 요리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두번째, 범신론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반대로 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 생각을 버리고 신의 생각이나 영역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교의 108배와 힌두교의 요가의 공통점은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육신의 감각을 잃게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무감각해지면서 신과 하나가 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훈련의 보급판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거기서 영감받아 이름을 붙인 제주올레길이 있죠. 계속 걸으면서 나를 잊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이것들도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곤 합니다. 통독, 필사, 금식, 기도 등이 여기에 동원되곤 하죠. ‘아니 목사님, 열심히 한다는데 그것도 문제가 됩니까?’ 범신론이 자연을 가지고 나를 잊어버린다면,  위에서 언급드린 것은 ‘종교중독’으로 나를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뭔가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포기하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나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선을 긋는 쿨한 이신론자들, 하나님과 격이 없을 정도로 선을 넘으려고 하는 스토킹같은 범신론자들. 신과 적당한 거리에 대한 고민없이, 나의 욕망 또는 나의 방향이 기준이 되어 신과 거리를 나 중심적으로 설정해놓는다면 신이 준비한 신비를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타종교 대해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 안에서, 성경 안에서 신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또는 성경의 방향이 무엇인지부터 알고서 신과의 거리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신이 준비한 신비한 만찬이 무엇인지 궁금해 교회에 나온 것이 맞다면 말이죠. 그럼 성경은 과연 하나님과 적당한 거리, 신비를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시죠.


2) 신과의 거리 
나를 멀리하고자 하는 사람과는 억지로 친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다가오고자 하는 사람의 의향을 알면 쉽게 친해질 수 있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어느 관계를 원하시는지 알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을 보면 알죠.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워지기 원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풍성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솔로몬 왕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전에 솔로몬을 보내셔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과 가까이하길 원하신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 특히 솔로몬이 소개되는 열왕기상에서 첫번째 그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지혜로운 재판”이 참 풍성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줍니다. 이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시죠.

두 여인의 분쟁 속에서 아기를 되찾게 해달라고 여인들이 부르짖습니다. 맨 눈으로는 누가 진짜 어미인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모순적인 한마디로 상황이 종료됩니다.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눠주어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죽이라니요. 게다가 반으로 나눠 어미들에게 반씩 나눠주라니요. 모순 중의 모순인 판결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펼쳐진 상황은 마법처럼 “역설”로 바뀝니다. 아이를 반으로 가르려는데 한 어미가 “어미의 위치”를 포기하고 아이를 상대편에게 넘겨주라고 합니다. 가짜 어미에게 자라는 한이 있더라도 아기를 살리는게 먼저입니다. 하지만 가짜 어미는 아기를 반으로 갈라서라도 나눠달라고 하죠. 이것으로 진짜 어미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모순이 역설진리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내셔서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어떤 관계로 사람을 만나고자 하셨습니까? 가까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어미의 사랑을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버리면서까지 사람을 살리고자 희생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자녀의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명예와 기쁨 모두 포기하는 어미되신 분입니다. 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이 가진 신의 위치를 모두 포기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시고자 이 땅에 오셨던 신입니다. 두번째로, 마지막날에 솔로몬과 같이 “재판장”의 모습으로 서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받는 자녀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순들이 마지막날 나의 한마디로 모두 정리될 그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라고 말이죠. 마치 솔로몬의 재판처럼 말이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다시 기억해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재판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어미의 심정으로 계신 부모입니다. 마지막날에는 우리의 모순적인 문제, 갈등, 아픔, 눈물을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나의 죄와 죽음까지도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이자 우리의 해결사 재판장입니다. 그 분과 가장 적당한 거리는 이 관계를 믿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믿으며 살아갈 때 아기가 어머니를 믿어가듯, 우리도 하나님을 하나하나 믿어가게 되어 신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죠. 

 

3) 적용 및 실천
요즘 역사학자들이 많이 보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예전부터 주목했던 한 분, 큰별쌤 최태성씨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 아는형님에서 “내가 지금 사교육현장에 들어가면 연 200억 정도 벌 수 있다. 나도 그 돈을 벌고 싶은데 갈 수 없다. 무료로 내 강의를 풀어서 한국사에 사교육이 없다.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온 거다. 무료로 많은 사람이 쉽게 역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최태성'이란 이름이 굳혀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200억이라는 숫자보다 더 먼저 들린 것이 있습니다. “인생이 이렇게 흘러온 것” 이라는 표현이 참 좋았습니다. 

최태성씨가 기독교인이던데 ‘하나님이 이런 사명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분의 의지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반대로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발언은 너무 획일적이어서 다른 이들에게 공격적으로 들렸을 겁니다. 마치 이렇게 살지 않으면 기독교인답지 않은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인생이 이렇게 흘러온 것’ 신이 준 큰 물결 속에서 나의 의지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노를 저으며 인생이라는 항해를 저어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다고 들리더군요. 이런 신비한 고백을 한 사람이 한 명더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내가 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것. 나의 결정처럼 보이지만, 내 속에서 일어난 큰 감동, 내 머릿속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데 나타난 지혜, 내 멘탈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지만 어떻게든 버텨진 그 인내의 시간들,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서 정말 감사한 나의 주변환경들. 온전히 나의 결정들로만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인생. 신비한 하나님과의 인생.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최태성 선생님처럼 말이죠. 아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뒤돌아보니 하나님이 하셨음을 고백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우리도 지금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데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눈 앞에 달려가야만 한다는 조급함과 초조함에 하나님이 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먹는 물도, 내가 데리고 다니는 몸도, 내가 출생한 그 현장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정말 많이 모릅니다. 정답을 다 아는 것처럼 살기보다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에게 교회는 신비를 가져다 줍니다. 신비한 창조주에 대해, 놀라운 구원의 깊이에 대해, 따스하고 포근한 선물 성령님에 대해. 우리는 그래서 교회에 다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며 신비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렇게 이번 한주도 하나님과 신비한 한주보내시고 다음 주에 신비에 감격한 얼굴들로 뵙기를 소망합니다. 

 

 





'제자양육 > 1단계 새신자_신과 함께_구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과 신비_젊은이예배 설교용  (1) 2025.02.21
1과 신비_강연용  (0) 2025.02.18
새신자반 5과 - 신인  (0) 2024.03.22
새신자반 4과 - 신성  (0) 2024.03.22
새신자반 3과 - 신기  (0) 2024.03.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