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X, !, ?!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신비에 대해서 "일이나 현상 따위가 사람의 힘이나 지혜 또는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한 비밀이나 일"이라고 말해줍니다. 한자로는 "귀신 신", "숨길 비"로 구성되어있죠. 그래서인지 포털이나 검색엔진에서 신비라는 키워드로 검색하게 되면, 귀신을 소재로 한 만화, 영화, 음모론 등과 같은 연관검색결과물들이 눈 앞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대부분 신빙성 없는 것들로 치부해버리고 말 것들로 여기기 마련이죠. 왜냐하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된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이나 패턴, 일관성을 가지고 증상이나 현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리 세대는 "내 눈으로, 내 생각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야가 좁아지다 못해 편협적이거나 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축소되어 "나만의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쉽게 말해 꼴통이 많아진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관점을 좀 넓혀보고자 합니다. 특히 종교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하는 젊은세대여러분이라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구분부터 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거나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3가지로 크게 분류부터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모순입니다. 모순은 생각이나 주장의 앞뒤가 맞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한쪽에 가서 A는 옳다라고 말해놓고, 저쪽에 가서 A는 틀렸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말은 모순이기에 "말이 되지 않"죠. 모순에 대한 예화를 하나 드리죠. 한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팝니다. 창을 소개할 때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말해놓고, 방패를 소개할 때는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말은 모순이 되어버립니다.
두번째 말이 안되는 것은 역설입니다. 역설은 모순과 비슷해 보입니다. 겉모습은 모순처럼 보이는데, 좀 더 살펴 속내를 보면 "확고한 사실"이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말이 안되는 것인줄 알았지만, 관점을 넓혀서 생각해보니 말이 되는 것이죠. 오히려 좀 더 살피지 않은 나의 실책을 발견하게 되죠. 방금 위에서 설명한 무기장수 앞에 내가 있다고 생각해보죠. 나는 모순적인 무기장수 앞에서 이것도 저것도 사지를 못합니다. 선택하지를 못해요. 그러다 결국 아무 무기도 사지 못해 뒤에서 쫓아오는 적군에게 죽고 맙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자유를 가지고 있는 나는 창이든 방패든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쉽게 선택하지 못하죠. 결국 이도저도 못하다가 죽게 됩니다. 차라리 자유가 없었다면 살 수 있었을 겁니다. 네, 때로는 우리 인생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많은 답안지들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다는 역설적 사실이 있습니다.
자, 모순과 역설. 이렇게 말이 안되는 두 가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모순이 아니라 역설도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역설 중에 역설 가장 꼭대기에는 "신비"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시덥잖은 것들로, 내 눈과 이성으로 확인이 불가한 것들로 치부해버린 것이 사실 "내 이성의 한계"였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태양은 볼 수 없지만, 태양빛으로 다른 것들을 보며 살아갑니다.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듯, 인간은 신비의 세계를 바라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신비로운 것들은 있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신비로운 것들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간 발견해오고 발명해온 것들을 통해서 "신비로운 영역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인류의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바다생물의 10%밖에 알지 못하며, 암질병의 원인도 밝혀내지 못했고, 아마존에 얼마나 많은 생물이 있는지 추정할 뿐이며, 우주의 시작과 끝, 인간마음의 존재와 위치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2. 내가 만들어 본 꼰대
자, 이제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해석하고 말하려고 하는 나에게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 중심"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게끔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인간의 습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면, 현대인들은 나의 감정과 경험에 근거한 결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듯 합니다. 이 때문에 "신비"라는 것은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이들이 흥미롭게 보는 귀신이야기나 음모론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명확한 신비한 영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가지는 사람들, 즉 자신이 모르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꼰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대대로 꼰대였습니다.
우리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모순, 역설, 신비라는 영역을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수수께끼같고 미스터리같은 신비의 영역을 향해 모순을 분별하고, 역설적인 세상을 해석해내고, 신비를 향해 나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실천은 간단합니다. 첫발걸음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단순한 한가지 사실에 대한 인정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무언가 배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주목하고 있는 인간의 성품 두가지가 겸손과 교만입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구할 줄 아는 겸손한 자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구할 줄 모르는 교만한 자로 나뉩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도구, 실험을 통한 결과를 뛰어넘는 "신비"의 영역에 대해서 인정할 줄 아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C.S.루이스는 "누미노제"라는 것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서서 영적존재에 대한 "소름끼침"이 있다는 것이죠. 네, 영적존재 또는 영적세계관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오늘 이 시간에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될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말하거나 좀 더 진중한 표현으로 진리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법률적으로 "자연법", 물리학자들은 "원리 또는 법칙"이라고 부를 겁니다. 역대로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보여져왔던 공통적인 법칙은 "종교의 유무"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종교는 존재해왔습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신"에 대해서 인간은 누누히 말해왔다는 것이죠. 신이라는 신비의 영역으로 다가서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무신론 조차도 신에 관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예배당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우리는 "어떤 신"에 대해서 생각하며 이 자리까지 왔는지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피터팬이 되고파
사람들은 많은 신의 모습을 생각해왔고 또 전해왔습니다. 이런 신의 모습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인간을 초월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신입니다. 대표적으로 무속신앙에서의 신이나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나타나는 신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이면서도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희생이나 다른 신의 조력이나 몰락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인간을 초월하면서도,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신입니다. 특히 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범신입니다. 모든 만유와 만물과 함께 하는 신으로써, 인간은 그 신과 합일을 위한 몰아일체가 목적이 됩니다. 무소유를 강조하는 이유도 이에 있지요.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인간을 초월하면서도,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신입니다. 이런 신은 대표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기서 성경의 신은 결정적으로 차이점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낮아지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이 독특한 성경의 신관입니다. 신비로운 교리 중 하나죠. 이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험하기도 쉽지 않지요. 예수님의 말씀 한 구절을 보시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존재가 서로 안에 있음을 말하면서, 제자들과 교회가 그렇게 서로가 서로 존재 안에 있는 하나가 되게끔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러할 때 세상이 "신이 세상에 메시야를 보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기독교의 신, 교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해야하는 이유,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통해서 삼위일체라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른이 되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제 마무리 짓겠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신은 인간을 초월합니다. 초월하다 못해 완벽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신입니다. 알 수 있는 신입니다. 알리기 위해 낮아지는 신입니다. 인간의 세계로 낮아지는 신, 예수입니다. 네, 나의 꼰대스러운 모순적인 나를 너머, 역설적인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고뇌하는 내가 되어, 신비를 분별하고 이해시켜주고자 하는 예수의 도움을 받아성숙한 인간이 되길 소망합니. 다음 시간에는 오늘 신비에 이어 "신"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chatGPT 질문지
📌 1. 모순, 역설, 신비에 대한 이해
- 글에서 제시한 모순, 역설, 신비의 개념을 각각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본다면?
- 모순과 역설의 차이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신비로운 현상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 글에서는 **"내 눈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했는데, 이에 동의하는가?
-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중요한 진리였던 사례"**가 있다면?
📌 2. 꼰대 문화와 열린 사고
- 글에서는 "꼰대"를 자신이 모르는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동의하는가?
-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이 왜 중요한지 설명할 수 있는가?
- 요즘 세대에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태도나 습관은 무엇이 있을까?
- 신비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맹목적인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 과학이 발전하면 신비의 영역이 사라질까, 아니면 오히려 더 많아질까?
📌 3. 신의 개념과 종교적 사고
- 글에서는 세 가지 유형의 신 개념(불완전한 신, 초월적이지만 알 수 없는 신, 자신을 드러내는 신)을 설명했다. 당신이 이해하는 신의 모습은 이 중 어디에 가까운가?
- 종교적 신념이 없는 사람도 신비를 경험할 수 있을까?
- 신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신비를 인정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적이다."**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신비를 설명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 4. 현실과의 연결 및 적용
-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신비로운 경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 현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신비의 개념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 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영원히 한계가 있을까?
- "자유가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신비에 대한 태도가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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