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롬16:25-27
제목 : 신비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1. 서론
오늘 설교는 이 질문으로 첫발을 떼게 됩니다. “왜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저도 40년째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선이 없으면, 평생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이르게 되죠. 그래서 이제부터 저는 여러분과 왜 교회에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하나하나씩 나누고 또 공감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죠. 신비.
제가 오늘 제목을 신비로 드렸습니다. 귀신 신, 초월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싹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영국 철학자 CS 루이스는 누미노제라는 두여운 감정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누미노제라는 것이라고 말이죠. 만약 이 공간 문 앞에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무섭습니다. 두려워요. 그런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아니라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볼까요. 호랑이를 생각할 때의 두려움과는 사뭇다른 느낌과 감정의 두려움이 듭니다. 그걸 오싹함(chill)이라고 우리는 부르죠. (요즘 chillguy밈이 유행인데 느긋한, 쿨한의 의미죠. 분주함 속에서도 차가울정도로 차분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호랑이에게서 받는 두려움과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입니다.
이것만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비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신비를 다루는 곳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비에 관심이 없거나 신비에 대해서 진중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분명 후에 교회를 떠나거나 또는 교회의 중직자가 되지만 신비와 상관이 없는 간판만 교회이지 정작 내부는 다른 사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여러분께 설 때마다 이 신비에 대해서 다룰텐데요. 그 다음은 신, 신기, 신성, 신인에 대해서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눈치를 채셨
듯이 신비로 시작해서 신비의 주체가 되는 신, 그리고 그 신이 신비하게 만든 우리가 가진 신기한 정체성과 능력들, 그리고 그 신이 결국 우리를 최종적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신인으로서의 목적지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본론
1) 신비와 다른 것들
신비, 미스테리라는 말은 뮈에인이라는 “입을 다물다, 감추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신비라는 한자어에서 신은 초월적 존재를 말하고 비는 숨겨진 또는 감춰진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와 통하죠. 네, 신비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다 못해 사람들 사이에서 감춰질정도의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영역에 대해서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신비를 말하기도 전에 타인에 대해 받아들이거나, 용납하거나, 이해하거나, 수긍하는 문화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극히 “개인주의”의 시대라서 그렇습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내 눈으로 확인되고, 내 생각으로 이해되는 것만 사실”이 된 시대이기 때문이죠. 그런 어른을 향해 꼰대, 그런 젊은이들을 향해 MZ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면 “나”라는 틀에서 나오지 않으면 결코 성장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비로 가기 위해 겪어야 할 두 단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모순입니다. 모순이라는 것은 주장의 앞뒤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무기장수가 창과 방패를 파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 창은 무엇이든 뚫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방패는 무엇이든 막을 수 있습니다.” 네, 모순입니다. 우리가 꼰대스러운 꼴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모순적이지는 않은지 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역설입니다. 모순적인 것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다보면 모두 다 버릴 것이 아닙니다. 모순적인 것들 속에서 빛나는 사실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세요. 태양을 눈으로 볼 순 없지만, 태양빛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비 온 뒤 땅은 더 튼튼하게 굳어집니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가지고 있는 역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순같은 세상같아 보여도 그 속에는 역설적 사실들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세번째 신비입니다. 모순적이지는 않습니다. 틀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계속 생각해봅니다. 연구도 해보고 고뇌도 해봅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남들은 깨달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도 겪어보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네, 신비로움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 구원이라는 신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들이죠. 모순은 아니지만, 그 어떤 역설적 사실들보다도 깨닫기가 어렵다 못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신비입니다.
2) 신비로움
배우 조정석씨가 조연생활을 할 때 대표적인 작품이 건축학개론입니다. 그 중에서도 극중 주인공에게 키스하는 법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키스에 대해 묘사할 때의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 키스에 대한 묘사에 대해 모두가 인정했고, 더 나아가 조정석씨의 묘사와 연기에 대해 공감합니다. 게다가 후일담으로 전해지는 건 이 장면 대부분이 애드립이었다는 겁니다. 그 때부터 조정석씨가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네, 키스는 책으로 전해질 수 없습니다.
한 남녀가 만나서 신체의 일부가 만나는 것조차 책으로 전달이 안되는데, 어떻게 예수가 내 안으로 들어와 구원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좋은 선물을 준다는 것이 간단히 전달되겠습니까.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한분으로 계시다는 것이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이해되겠습니까? 네. 신비로운 것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신비로운 것은 신비로운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성부와 성자가 서로 연합되었듯이, 교회의 지체들도 서로를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성부가 세상을 구하러 성자를 보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네! 우리가 교회에 다녀야 하는 이유, 죽어도 싫은 저 사람과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 이 속에서 예수와 하나가 되는 나,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신비로움은 결코 지식으로 접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가 싫은 저 타인과 함께 할 때 주어집니다. 참으로 신비롭지요.
여러분. 이렇게 신비로움은 결코 단순하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복잡하고 때로는 난해하며,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나 통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속한 기독교 신앙생활에서는 주어지는 많은 것들이 이렇게 난해하고 복잡하고 쉽게 얻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플하면 좋겠습니다만, 하나님 자체가 삼위일체고, 예수는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고 말하며, 신자인 우리는 구원을 이미 받았지만 원죄라는 것이 아직도 남아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면서도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네, 기독교는 말 그대로 신비로움입니다.
그런 점에서 반대로 지양하는 점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단순화시키는 것들입니다. 특히 기복주의 신앙과 신비주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도 하시며 또 신비로운 방법을 통해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숙해져서 든든하게 서서 모순적 이 세상을 뚫고 나갈 강건한 자로 세우길 원하시지, 하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미성숙하고 불균형적인 신자로 결코 세우지 않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젊은이들을 향해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한다”라던지,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그 다음의 하나님과의 경험도 그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우리는 지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기적을 일으킨 엘리야의 방법을 통해서 이세벨 그 한 사람도 못 바꾸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끌고 시내산에 가셔서 말씀으로 채워주셨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왕이 아니라 고난받아야 할 종인 것과 낮아지면 높아질 것이라는 원리,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어 부활해도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가야 제자들에게 더 좋은 선물인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고 하셨죠.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적으로 가장 좋아보이거나 확실한 것으로 일하지 않으시고, 비유와 역설, 신비로움과 인내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비로움을 향해” 나아갈 줄 아는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3. 결론
제가 최근에 중요한 시간을 보름정도 가졌습니다. 여러가지 진로에 관한 고민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저희 아버님이 58년 개띠이십니다. 그런데 그 진로고민을 지금도 하십니다. 네, 인간은 평생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50년간 외치신 우리 아버지도 여전히 앞길에 대해서 고민하십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교회 오래다녔다고 해서 앞길이 창창하거나 또는 고민이 없다고 결코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민과 번뇌라는 현장 속에서 어떻게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하나님과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말해줍니다. 신비라는 것을 통해서 말이죠.
세상에서 정말 큰 불행이 가지고 싶은 걸 못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있다고 합니다. 가지고 싶은 걸 가진 것이라고 하네요.(이형기) 욕망으로 살아가다가 욕망조차 없어지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신비로움”을 향할 수 있도록 신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신비로운 하나님의 세계,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세계를 향해 차지하고 누리는 신비하고도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지금은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지금도 통치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화와 감동하심과 교통하심이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하심을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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