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출 13장 17-22절
제목 : 마음을 돌이켜
1. 서론
1) 예화
이번 노벨문학상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감회가 새롭죠. 한강 작가는 인간다움에 대해 즐겨 말합니다. 대표작 채식주의자에서도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찾는 인간다움에 대해 말합니다. 폭력이라는 비인간성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말하고자 하죠. 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것일까요? 남들만큼만 사는 것이 인간다움일까요? 한강 작가는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할 모습을 통해 인간다움을 말하려 한다면, 성경은 좀 더 직접적으로 이것이 인간다움이다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2) 주제
요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폭력이라는 바로와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들을 더 참다운 인간다움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400년전 요셉이 이렇게 약속한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19) 그리고 그 약속이 이렇게 이뤄집니다.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네, 성경은 인간다움에 대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 안에 중심에는 "나와 함께하고자 하시는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엄청난 행동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약속되어져 있고, 그 약속이 이뤄질 것이라는 소망을 인간은 먹고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약속을 믿지 못하여 다른 무엇과 약속을 더 중하게 여기고, 그것에 소망에 둠에 따라서 인간이 폭력성과 비인간성을 보인다는 것이죠. 그것은 때때로 자신의 높은 지위를 통해 낮은 자를 향한 강압이나 비참한 현실을 덮어두고 화려한 것들로 꾸밈으로써 자기자신을 속이는 위선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되어갈 수도 있는 것이죠.
3) 본문잇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런 괴물이 되지 않도록 몇가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죠.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인간다운 인생으로 한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비인간성
요즘 큐티하고 있는 출애굽기 한 구절이 계속 생각납니다. 노예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게끔 애굽에서 탈출시킨 이스라엘이 위기에 봉착하자 이런 말을 합니다.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2) 호의와 인자로 자유인이 되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위기를 만나자 다시 폭력 안으로 들어가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정착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런 태도를 내내 보이게 되죠. 잠깐 식수가 사라지거나, 먹을 거리가 부족할때 이들은 노예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습니다.
그 밖에도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쌓지 못해 괴물처럼 변해버린 이상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여럿을 소개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이 그토록 비판했던 율법주의자들로,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과 초조를 없애고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과도한 신앙생활체계"를 만들어 냈지요. 두번째가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출애굽세대가 한 행동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송아지사건"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했던 말을 보시죠.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32)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잠재적이고 내재되어 있는 불순종적이고 반항적이며 폭력적이어서 위기 앞에서 오히려 폭력 뒤에 숨으려고 하는 성향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습성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겠죠. 이런 인간의 습성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예견하실 정도로 인간은 약속이라는 신뢰의 인간성 보다 눈 앞에 펼쳐진 폭력적 억압에 더 빠르고 민첩하게 반응합니다. 조금 더 쉽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변하지 않는 신뢰보다도 시시각각 변하는 폭력에 더 쉽게 반응하고 순응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7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약속을 기억하기 전에 눈 앞에 있는 상황에 더 매몰되어 신뢰가 무너져버리는 것. 그것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를 의심하다 결국 관계가 깨어지는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이며 불연속적인 습성에 대해서 인정해야 합니다. 코로나가 전세계에 터졌을 때에 가장 잘사는 국가들이 앞다투어 치료약을 선점했으며, 국제정세 속에서 영원하고도 정의로운 중립적이고 선한 국가경찰은 없으며, 정치세계에서 환상같은 선구자요 구원자로써의 정치인을 우리는 기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인간은 악하고 약삽빠르며 폭력적입니다. (특히 이번 노벨문학상 소식에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가는 선동적인 소식들에 기가 찹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인간다움
위기와 역경을 앞두고서 인간은 자신의 진면모를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때 먼저 선택하고 먼저 손을 잡는 것이 그 사람이 가장 믿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홍해를 앞두고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가 노예생활을 하려고 했던 습성은 여전히 하나님과의 신뢰도가 쌓이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 어울리는 것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자리에 계속 앉히고 계시는 것이죠. 그 자리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것을 지키는 자리입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습성을 아시면서도, 그들이 변해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3가지가 보여집니다. 먼저 과거의 것으로 준비해주십니다. 400년 전 선조들의 유언을 기억하게끔 하나님은 요셉이 살아생전에 후손들에게 출애굽때에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게끔 맹세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두번째로 미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실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전수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입니다. 18절을 보시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지금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까지 말씀하셨죠.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영원한 것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게끔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현재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지되게끔 하셨던 것이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22)
여러분, 신앙생활은 결코 단면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라는 수준의 신기한 신앙은 속임수이거나 진짜더라도 정말 단편적이고 수준낮은 신앙입니다. 과거에 함께 했던 기억과 말들을 기억하며 서로의 신뢰를 가지고 그것을 현재의 판단과 결정에 녹여내는 관계. 그럼으로 말미암아 먼 미래까지도 서로라는 사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망라하여 입체적이고 고차원적이면서도 깊은 신뢰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수준높고 성숙한 신앙생활이겠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셨으며, 이렇게 만들고 창조하신 이유를 현재 나의 삶 속에서 찾아 확인하고 감사하게 되어, 오늘의 삶을 통해서 확인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미래를 향해 하나님이 하신 약속들을 더 신뢰하게 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이겠습니다.
3) 지금 우리는
저는 올한해 지역에서 여러가지 모임들을 만들었습니다. 축구, 무용, 글짓기, 공예. 이걸 하면서 의문이 들더군요. '내가 지금 문화센터를 하는건가, 키즈카페를 하고 있는건가?' 이런 의문 또는 회의감이 들때마다 저의 심령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었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긴다는 과거에 예수님이 가지셨던 사랑의 마음. 그리고 그 사랑함으로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이실 것이라는 약속된 믿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높여주실 것이라는 미래를 향한 소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죠. 그것으로 저의 정신과 내면을 다잡으면서 섬기는 생활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은 2개의 아줌마 모임으로 확대되더군요. 그 모임들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는 교회"가 될 그날까지 섬겨가는 것이죠.
물론 모두가 다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함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일하신 방식과 역사하셨던 섭리를 알고 그것을 믿으며 그것을 나의 미래로 삼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인간다움"이라는 것이죠.
이제 가을음악회가 1달가량 남았습니다. 앞에 초청장이 놓여져있습니다. 제가 누누히 말씀드려왔습니다. 이 초청장을 앞에 두고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보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인가? 나의 인간다움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 행사에 사람이 가득해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의 인간성이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행사는 한주하면 끝나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한달간의 섬김의 과정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그 사랑이 여러분을 통해 그 분에게 전해지는 것.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7)
3. 결론
이번에 한강 작가는 "전세계가 전쟁통인데 무슨 잔치냐"며 수상인터뷰를 모두 거절하고 번호까지 바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쟁뉴스가 난발하는 이 시대에 이런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인간다움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적절한 수상작가를 배출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남들만큼 사는 것이 인간다움입니까? 아니면 어떤 기준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인간다움입니까? 우리가 폭력이라는 간단하고 쉬운 체계 안으로 숨어 들어가지 않길 소망합니다. 남들이 다 순응하니까 그것이 맞을 것이라는 어렴풋하고 두리뭉실하게 타협하며 섞여 살아가지 않길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폭력 앞에서 사랑을 지키고 말하고 행하기 위해서 낮아지고 침묵하시고 견뎌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번 한주, 삼위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것으로 살아가며, 한주간도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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