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행 2장 1-8절
제목 : 질문하는 영성
1. 서론
1) 예화
실리콘밸리에서 유치원교사로 일하고 있는 임혜진 선생님은 질문하는 아이로 양육하는 양육법으로 “얇은 질문과 두꺼운 질문”을 소개해줍니다. 질적으로 다른 질문의 차이를 계속 연습하다보면 생각의 깊이가 다른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나중에는 해결책 방안을 강구하는데 있어서도 계속해서 더 깊은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게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부모는 평소에 자녀에게 질문하지 않다가, 지적질을 위해서 얇은 중에 가장 얇은 질문을 한다는 겁니다. “숙제 했니? 진짜 한거 맞아? 검사 안해도돼?” 옳은 질문은 “아이의 입을 닫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아이의 입을 열게 하는 질문”이겠죠. 이것은 다만 부모자녀사이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과 만났을 때 대화가 안되는 사람들의 화법이 그러합니다. 뭘 물어도 단답으로 말하고 또 나에게 질문을 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는듯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뭘 물었을 때 성심성의껏 답하고 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처럼 질문해주면, 대화가 참으로 유익하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좋은 질문을 통해서 부모가 자녀를, 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좋은 질문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2) 주제
사랑하면 질문하기 마련입니다. 상대가 궁금하고, 상대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상대의 생각을 따라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들을 보며 신기해하며 질문하는 자들의 말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 네, 이 질문들을 가지고 있던 3천명의 사람들이 그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세례를 받으며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바랬던 제자들이 성령 하나님을 기다리니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3천명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전까지는 간헐적으로 성경의 인물들에게 임했다가 떠나가셨다가를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함으로써 인류는 깨끗하고 거룩한 자가 될 수 있었고, 이 사실을 믿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에게 거룩한 영 하나님의 영 성령 하나님은 영원히 떠나지 않는 존재로써 임하셨습니다. 12명의 사도들과 같이 120명의 제자들은 독특한 대상입니다. 예수님을 받은 12사도가 더 이상은 없는 것처럼, 성령임재를 직접 받은 120명의 제자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수도 성령도 임하셨고 사역하시어, 인류 전체가 예수의 공로와 성령의 임재를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이 120명의 제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3) 본론잇기
오늘 말씀을 통해 질문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더 나아가 그 질문에 답을 주시고 역사해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아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1) 질문하지 않는 우상숭배자
사실 3천명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들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해줍니까? 4-5절입니다.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5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충만으로 신비한 광경을 연출해내니 그 주위에 있던,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와있던 율법을 충실히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었음에 불구하고 왜 그들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까요? 왜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자들만 받았던 것일까요? 혹시 그들에게 어떤 문제나 흠결이 있었던 것일까요? 경건한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일까요?
바울은 수제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멀리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하는 자들을 멀리하시오”(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그 구절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지금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러한 자들이기에 그들도 같이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한가지 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 바로 질문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중간에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7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갈릴리는 이스라엘을 대표적인 깡촌을 말합니다. 교육, 문화, 의료, 복지가 다 낙후되어 있는 수준낮은 동네를 일컫는 말이지요. 즉, 경건하지만 경건의 능력을 제한시키어 깡촌 수준낮은 이들에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믿음의 실체를 자기도 모르게 입밖으로 꺼내버린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예수님을 믿어서 영혼이 의롭고 순결해져서 성령님을 받을 만한 의로운 자가 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충분히 해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 한 청년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물으니, 예수님은 “계명들을 잘 지키라”라고 하셨지요. 그 때 청년이 이 율법들을 모두 잘 지키고 있다고 하니, 예수님이 다시 한번 더 명령하시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했더니 그 청년이 근심하고 떠나갔지요. 그러시면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지만, 하나님으로써는 가능하다”(마19장)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 말씀에서 말해주는 것은 결코 인간이 선한 행위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증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령충만한 120명의 제자들 곁에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도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나를 바라보며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번째,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궁금해하는가? 두번째,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휴일 아침부터 나와 예배드리고 생돈을 헌금으로 드리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한가? 세번째, 내가 궁금해하는게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가장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네번째, 이것을 나는 우상이라고 인정하는가?
여러분,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질문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너무나도 간절히 유다사회의 부패에 대해서 호소하니, 하나님이 심판을 내릴 민족을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하박국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합1:13) 기껏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데,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신다고 비꼬며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제자들처럼,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왜 내 기도제목은 들어주지 않으시냐고 따지는 우리의 모습처럼 말이죠.
2)
여러분, 우리가 질문을 던지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옳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부터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3천명이 했던 옳은 질문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답이 되주었던 사건,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여러분, 지난 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때는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으시고 승천하셨고, 그렇게 120명의 제자들은 모여 기다렸더니 열흘만에 성령 하나님이 임재해주셨습니다. 그날이 오순절, 즉 추수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네, 추수하는 날 성령님은 임재하시어 제자들을 추수할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두 번째, 성령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개인 집에 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지금이냐고 온갖 실수투성이 질문을 하던 제자들이 모여서 기다린 개인 집에 성령님은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소를 따지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3절에 보니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성령 하나님은 사람에게 임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성령이 임하시는 전”인 것이지요. 세 번째,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실 때 조금 설명이 깁니다. 2절에 보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님을 뜻하는 불이 임했다고 표현합니다. 이 바람같은 소리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싸워 이겼지만, 자신의 방법대로 이김에 따라 영적탈진이 오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시어 어떻게 하셨습니까?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이 지나갔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세미한 소리가 있었다”(왕상19:11,12)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으로 영적충전을 시켜주신 것이지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하나님의 소리”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말씀이지요. 천지창조 때 하나님의 호흡으로 흙덩이인 우리가 생령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니 성령 하나님이 제자에게 임해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나라의 대리통치자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추수되는 날이 시작됩니다. 성전을 뛰어넘어 각 개개인지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임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어 제자들이 만국의 언어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본래 스스로 높아지고자 바벨탑을 짓고자 할 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언어가 흐트러져버린 인류가 성령 하나님의 임재로 서로 언어가 소통되어지는, 즉 하나가 되는 시발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네, 이제 인류는 누구든지 또 남이든지, 원수이던지, 어떤 높은 장벽이 있는 관계이던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임재해 계시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싸우고 다툴 때에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밖에서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계신 다른 성도와 만나 반드시 갈등이 빚어집니다. 왜냐하면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추수, 성전, 말씀이라는 영적언어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 속에서 세상의 언어, 합리성, 자기중심, 성취도로 가득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 시작하면 결국 틀어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가? 어떤 언어를 구사하는가?“
3)
여러분. 우리는 타인에게 잘못된 질문을 할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러지?“ 이것은 소통하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지요. 내 감정을 섞은 채로 비난하고자 하는 잘못된 질문입니다. ”저 사람이 저럴 수 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랑의 첫발걸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큐티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내 인생은 왜 이렇죠?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자꾸 저에게 고난만 주시는거죠?“ 하나님께 이런 질문으로는 아무 것도 소통도, 희망도, 기쁨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랑스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채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옳은 질문을 할 때에는 이미 그의 표정, 말투, 행색 등을 살피며 질문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할 때에 몇 가지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로 구하셨으며,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그 사실 안에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두고 하나님께 질문하다보면, 어느샌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용기, 기쁨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임재해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분이 주시는 길로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질문은 단순하지도 또 감정을 섞지도 않습니다. 풍성한 교제 가운데 물으며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 섭리를 가지고 우리는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처음에 행복한교회에 왔을 때만 해도 사실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잡힐 때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몇몇 아이들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몇몇 가정을 만나게 하셨고 또 그 가정들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 앞 대로와 교회 옆 놀이터, 교회의 지하공간이 저의 최대 사역지가 되었습니다. 2년 전만해도 교회 안에서 한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너무나도 힘들었던 시간이었는데, 성령 하나님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섬기다 보니 놀이터에서 심방을 하게 되고, 지하 공간에서 비신자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양육하게 되고, 아시다시피 어제부터는 주차장에서 아이들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따라 사역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영혼의 추수를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도할 때마다 점점 하나님께서 새로운 영혼구원의 사역 아이디어를 주십니다. 요 근래에 몇몇 청년들이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청년들을 통해서 우리교회에 명단에 있지만 교회출석이 힘든 청년들을 섬겨야 하겠다는 용기와 지혜도 주시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한 목사에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십시오. 보이는 돈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영혼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방향, 목표, 질, 퀄리티가 달라질 것입니다.
3. 결론
한 신자님과 주중에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는 교회에 오는 새신자와 교제가 정말 하고 싶다고,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하고 싶은데 그 길을 찾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은 교회에 오면 가끔 시간이 날 때가 있는데 그 때 전도용품을 가지고 나간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관심이 있으니까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소그룹 찬조건. 여러분, 주변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요. 매번 보던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마음 안에서 성령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중에 여러분이 맞이하게 될 결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추수되는 그 때에 나 홀로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그 사람 안에 영혼을 바라보고 사랑하며 하는 질문들로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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