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행전
본문 : 행1:3-9
1. 서론
1) 타임머신, 기다림.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를 꼽으라면 "기다림"일 것입니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힘드니까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며 드는 감정을 살펴보면 왜 힘든지 알 수 있는데, 여러분이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다릴 때 우리는 두 가지 감정이 서로 교차하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설렘과 괴로움입니다. 기다림이 끝나는 시간이 가져다 줄 풍성한 결과가 있기에 설레이며 기다립니다. 반면 기다림이 끝날 시간이 되기까지 가지는 초조함과 불안감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오죽하면 군전역을 기다리는 군인들에게 "국방부 시계는 느리다"는 표현까지 생겼을까요? 얼마 전에는 역대급 훈련을 앞둔 포병 병장 한사람이 자신의 전역을 1달 뒤로 늦춘 것이 화제가 되어서 뉴스취재까지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설렘과 불안 안에서 기다릴 줄 아는 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되기도 하며, 명예로운 은퇴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면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도 해주게 합니다.
2) 주제
네, 기다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기다림의 시간이 때로는 우리를 전혀 다른 존재로 성경에서도 많은 성경의 위인들이 기다림의 시간을 가집니다. 기다림은 치유를 주기도 하고, 우리를 강건하게도 해주며,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까요? 여러분. 우리 기독교에서 기다림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앞으로 이뤄질 일을 미리 이야기해주시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신약시대에서 우리는 “예수가 이 세상의 종말을 가지고 올 날”을 기다리기 때문이죠. 기다림을 오해하고 왜곡했던 종이나 기다림을 별중요치 않게 여겨 잠들어버리고 준비할 것을 준비하지 못한 신부로 예수님은 표현하기도 하셨죠. 예수의 제자들은 깨어서 그 날을 향해 기다려야 할 자세에 대해서 더 적극적으로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시어 천국에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서 떠나가셨습니다.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네. 제자들은 기다림으로써 한 여인이 새생명을 잉태하는 영적어미로의 차원으로 가기도 하며, 훈련장에서 뒹굴며 힘든 시기를 거쳐왔던 훈련병이 임관하여 정식군인이 되기도 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이가 세상을 배워 어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다림의 시간 끝에 무엇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을까요? 8절에서 “증인”이라는 분명한 위치와 역할을 주셨습니다. 네, 우리 신앙의 명확한 목표를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3) 본론잇기
이번 여름에는 우리가 집중적으로 사도행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7-9월 3개월 동안 우리의 행전을 써보고자 합니다. 과연 어떻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사도행전을 썼듯이, 우리도 놀라운 행전을 쓸 수 있는지 이번 여름을 기대해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본론
1) 욕망이라는 능동
고인 물은 썪기마련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지금 예수 공동체에서 제자들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썪은 물과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와 동행하는 내내 예수가 로마군을 내쫓고 가식적인 바리새인들과 동족을 팔아먹는 세리들을 물리쳐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자신들이 이룰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서로 세력다툼을 해왔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대를 무너뜨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어도 쉽게 변하지 않나 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40일동안 동행하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6절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6절)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꾸 이스라엘 나라를 말합니다. 고여도 너무 고여서 썪은내가 진동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그들의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을런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칼빈은 이구절을 뭐라고까지 표현했냐면, “그들의 질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회복하다라는 동사는 지금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에 대한 복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만의 민족에 한계를 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라는 것은 지금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해달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죽고 부활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썪은 존재였습니다.
여러분, 우상이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것이 있으십니까? 특히 우리 장로교는 십자가까지도 예배당에 두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에 우상이라고 했을 때 딱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우상이라고 하면 천주교의 마리아상이나 불교의 불상 정도가 생각나지요. 거기에 절하며 복을 간청하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서 굉장히 또 민감하게 반응하시는데, 십계명 2계명에 ”우상을 만들지말라“고까지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만드는 것은 손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우상을 우리의 내면에 만드는 것이 더 무섭도록 견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에 예수님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고자 했던 나라는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아무리 말해줘도 “나의 관점“으로 가득차 있다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는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제2계명 “나라는 우상”에 대해서 참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자아”라는 우상은 놀랍도록 긍정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있습니다. 자존감, 자신감, 자긍심, 자아성취. 이런 단어들로 이뤄진 껍질을 벗겨놓으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나의 욕망”이라는 것이 잠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께서 “목사님, 적정수준의 것들을 구하는 것이 우상이 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대답은 예니요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여러분이 타인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구하는 것은 우상이 될 것이고, 타인의 영혼을 바라보며 구하는 것은 오히려 선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우상이 될 수도 또 선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여러분의 “욕망”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욕망에게 내주면 우상이 되고 그 욕망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오면 선한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어느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인간의 행동은 “나를 위한 것과 다른 이를 위한 것으로 모두 양분할 수 있다“고 말이죠. 여러분은 얼마든지 우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제자들처럼 고여서 썩은 물처럼 말이죠.
2) 기다림이라는 수동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승천하시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들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고 가셨을까요? 4절과 8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말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즉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영혼을 구하고 영혼을 위해 싸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성령을 기다리라” 였습니다. 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4절에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7절에서는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이니 너희 알바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또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때 제자들이 되는 목표는 “증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여 썩은 물과 같은 제자들의 해결책으로써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좀 더 상세히 살펴보죠. 가장 중요한 단어는 “수동”입니다.
(1) 성령을 기다림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때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때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는 지금 말씀하신 때로부터 열흘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뤄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은 더 강력하게 이들에게 강력한 아이디어와 마인드를 부여하시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 이스라엘이 정말로 회복되는 때“를 향해서 살아가게끔 하셨지요. 이 두가지 모두 제자들이 무언가 열심으로 능동적으로 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일하심”으로써 수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인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것을 오해하고 방언을 받기 위해 혀가 꼬이는 단어를 반복시키는 기도훈련, 눈을 감고 무엇을 보게 만드는 명상훈련, 감정에 집중하게 하여 인위적인 은혜를 만들어내게 하는 훈련, 내생각과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신앙훈련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 앞에서 기다리는 자이며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신앙성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장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때를 고대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께 낮아지다보면, 어느샌가 나의 인격과 성품, 영혼의 깊이, 확신, 용기, 기쁨이 강력해져있습니다.
(2) 증인 - 예수님은 제자들이 때를 기다리면 성령이 임하시어서 “권능을 받아 증인이 될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며 또 되어지는 것임을 기억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된다고 하셨습니까? 증인입니다. 증인은 어떤 자입니까?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경험함으로써 그 사건의 주체자의 곁에서 경험한 것을 진술하는 간접적이고 수동적인 자입니다. 결코 능동적으로 그 사건을 주체적으로 끌고가는 자가 아닙니다. 증인은 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전도하려고 하셔도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받음으로써 실행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수레공수거라는 말이 있지요. 빈손으로 온 인생이니, 빈손으로 간다는 원불교용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글자를 바꿔 우리네 인생을 공수레만수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빈손으로 왔지만,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고 살게 하시어, 마지막에는 은혜와 구원의 선물로 가득찬 확신으로 떠나게끔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증인의 삶을 기다림의 믿음으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3) 증인
제가 얼마 전에 동기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어떤 분은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있고, 또 어떤 분은 청년목회를 잘하셔서 개척 몇년 만에 벌써 200명이 모인다고 하더군요. 사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다 똑같은 동기들이었는데, 그 모임 안에서 알게 모르게 더 비중을 두는 사람들로 나뉘어지더군요. 그렇게 싱숭생숭하게 모임을 마치고 이번주 내내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시간을 가져보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해주시더군요. 네, 제 세속적인 기준이 미국박사학위에 있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수로 생각하고 있었더군요. 그 곁에서 열심히 사역하면서 눈에 띄지 않았던 다른 동기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제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나서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있는데, 하나님이 사역을 더 시키기 시작하시더군요. 중학생 무리가 날마다 찾아오고, 이제 초등학생 여자친구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이번주에는 다른 학부형들이 교회로 찾아와 교제하기도 하고, 또 한분은 저와 다른 학부형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작정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교회로 또 저의 손길로 찾아오고, 저의 입술로 힘을 얻고, 저와 함께 하는 기도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하니 저야말로 “공수레 만수거”의 한주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즘 묵상하는 에스더는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강력하게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지성, 마음, 의지에서 일하시어 그들의 발걸음과 할 말들, 선택과 결정들에 대해서 이끌어가심을 우리는 그 책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다리가 맞아도 이렇게 맞아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네. 하나님은 비어낼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에 역사하시면, 너무나도 가득 채워주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11월 추수감사절을 향해서 나아가려 합니다. 특히 이번 여름을 맞이해서 3개월간 사도행전을 우리의 행전으로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주보 안쪽을 보시면 사도행전 중요구절을 개인 또는 가족이 함께 암송하실 수 있게 했습니다. 또 그 아래에는 중요한 내용들을 퀴즈형식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8월 말에 함께 묵상하고 연구한 사도행전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충만해지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11월 추수감사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으로 가득차길 소망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하나님의 영혼사역에 동참하니 저절로 높아졌던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기다리라고 하여 순종했더니 증인이 되어 가장 귀한 사역들을 하게 된 제자들처럼, 세속적으로 고여 썪어져 메말라질 운명인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기다릴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결론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받은 것은 세례와 성령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 아십니까? 여러분은 대부분 세례를 이미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사건이 있은 이후로 성령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시어 신자가 되기로 한 모든 이에게 임하셨습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증인”이 되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춘 분들입니다. 이제 “내가 나의 삶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능동적 우상숭배”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이끌어가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한 주동안 하나님나라의 증인이 되어서 섬김과 사랑, 예수의 헌신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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