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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설교/우리행전_사도행전

우리행전(3) 누구를 불러야 합니까?

by 우루사야 2023. 7. 2.

제목. 우리행전(3) 누구를 부르고 계십니까?
본문. 사도행전 3장 16절 

 

1. 서론
1) 예화 
미스트롯에서 송가인씨가 자신의 인생곡으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1절과 2절 사이에 독백이 담겨져있습니다.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계세요…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여보" 네.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공할 때에, 북한 군은 자기들만 도망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데리고 북으로 끌고 갔습니다. 철삿줄로 두손을 꽁꽁 묶고 엄동설한에 맨발로 걸어가게 합니다. 그 남정네들을 놓치지 못해 따라오는 처자식들이 줄줄이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이 바로 미아리 고개였던 것이지요. 그곳을 넘으면 경기도 전선이기에 이곳이 마지막이었고, 끝내 이 고개를 너머서 생이별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분단국가가 되어 남편을 잃어버린 아내들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미아리고개 큰 왕복 8차선 한켠에는 무당집들이 쭉 늘어서있습니다. 아무리 여보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남편, 언제나 돌아오려나 붙잡을 것은 무당밖에 없지요. 그래서 80-90년대에는 점보러 가려면 "미아리고개로 가라"고 할 정도였던 것이지요. 

 

2) 주제 
우리 인간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거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문제를 풀어낼 수 없는 고난이 닥쳐오면 겸손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 전에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내 생각으로도 얼마든지 이 인생을 풀어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듯이 고난이 오면 금새 내가 가진 힘과 배경이 얼마나 나약한지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그 때 누군가를 부릅니다. 아이가 부모를 찾고, 친구가 친구를 찾으며, 부부가 서로를 부르고, 시민이 경찰이나 소방관을 찾게 됩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누군가를 찾기 마련인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나 자신이 겸손해야 한다는 깨달음과 도움을 준 이에 대한 감사, 더 성숙해져야겠다는 동기부여를 가지며 성숙하게 됩니다.
그 중 단연 최고는 "영적성장"일 것입니다. 친구나 부모, 세속적 권력, 지혜로운 멘토 등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없고 내가 맞딱들여야 하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영적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이지요. 성경에서 고난의 대명사하면 욥을 모두 떠올리실 겁니다. "11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3) 욥은 '왜 하나님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도저히 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겁니다. 이 질문 속에서 수많은 대화를 친구들과 나눈 욥에게 마침내 하나님은 답을 주셨죠. 어떤 답일까요? "너는 무엇을 잘못했구나, 네 친구 엘리바스의 답이 옳다’라는 식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즉 '하나님께 묻는 인생임을 알라’였습니다. 이에 욥은 하나님을 어설프게 알기만 하다가 더 성숙하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인생이 되었지요. 그리고 그 후에 복을 받았음을 욥기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네, 단연코 가장 성숙한 성장의 예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3) 본문잇기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3장 앉은뱅이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말함으로써 일으킨 베드로의 설교의 주제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구걸을 위해 사람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초능력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르지도 주목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불러야 할 이름은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2. 본론
1) 잘못 부르는 인생
우리가 살펴볼 사도행전 3장에서 단연코 핵심적인 인물은 앉은뱅이일 것입니다. 그에 대해 누가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제 구 시 기도 시간베드로요한성전에 올라갈새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3그가 베드로요한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오후 3시였습니다. 저녁제사를 위해 기도시간을 가지려고 유대인들이 성전에 들어가고자 할 때였습니다. 특히 미문, 아름다운 문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많이 쓰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메고 그 문 앞에 두어 구걸하게 합니다. 그렇게라도 생계를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것이었지요. 여기서 이들이 가진 "한계의 경건의 모양"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1) 장소의 한계 : 이들은 앉은뱅이를 다른 문보다는 미문에 앉혔습니다. 이방인에게는 도저히 구걸할 수 없다는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예배하는 장소로들어가 구걸할 수는 없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또 만남의 장소로 쓰이는 문 앞에서 구걸하자는 것이었지요. 이 앉은뱅이의 마음에는 "자신이 그어놓은 한계와 그에 따라 부르는 대상"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성전은 단순히 '돈을 구걸하기 위한 장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2) 개인의 한계 : 그런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키니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쭉 앉은뱅이였는데 그가 성전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뛰며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가와 그들을 부르며 어떻게 한 것이냐 묻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12) 그렇습니다.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국한시켜버렸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언가 특출나 이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결론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고 역사는 일어날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성전보다 성전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돈을 보고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그의 시야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반대를 볼까요? 예수가 태어나 아기로 성전에 방문할 때에 그곳에는 시므온이라는 자와 안나라는 과부 여선지자가 아기 예수를 보고 성령에 감동되어 감격하며 예수를 안기도 하고 또 예수에 대한 복음을 해설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는 그런 성전에서 오로지 돈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제가 얼마 전에 이찬수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동맥경화를 두고 교만에 대해서 설명하시더군요. 동맥경화, 몸의 조직이 단단하게 굳어지고 탄력을 잃는 겁니다. 동맥이 딱딱해지듯 생각이 굳어지는 것이 교만, 경화라고 말합니다. 유연함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증상 두번째가 분노입니다. 생각이 경직되니까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해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앉은뱅이는 성전에서 영적동맥경화에 걸렸습니다. 영적으로 굳어져서 하나님이 하실 일은 기대하지 못하고 또 이방인들에게 자존심은 있어서 자신이 허리를 굽힐 만한 사람이 되는 유대인들에게만 구걸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드리며 기도하는 경건의 모양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영적경화가 와서 경건의 모양을 얼마나 더 쌓아야 이런 기적을 일으키게 될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유연함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경화였습니다.
2) 예수를 부름
동맥경화 치료제는 무엇이겠습니까? 피가 잘 통해 혈액순환이 잘되도록 혈관이 유연해지게 하면 되지요? 그 길은 하나입니다. 맑은 피가 잘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없더군요. 우리 영적경화, 즉 교만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쌓아온 영적경계와 영적불신앙을 넓히어 우리의 영혼의 활동을 넓히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것을 설명하고자 이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16절을 다시 볼까요? "16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여기서 "이름"이라는 단어를 계속 말합니다. 그 이름. 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름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교회로 한 기증품이 전달이 되었습니다. 각종 영양제였습니다. 유통기한 임박품이라 지역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되었는데, 많은 주민분들이 오셔서 나누어 가져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주민분들이 오셔서 반신반의하십니다. 이게 무슨 영양제인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의구심을 가지셨지요. 또 약이다 보니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 때 가장 확실한 것은 "쿠팡과 네이버"였습니다. 여기서 검색해보시면 나오는 제품이다! 이 말 한마디가 엄청난 공신력을 가지게 해주더군요. 쿠팡과 네이버라는 이름이 주는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름이라는 단어의 참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이름을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줍니다. 


(1)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그 앉은뱅이의 다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마치 보이지 않는 영적능력이 그의 다리에 들어가서 악하거나 병든세포들이 떠나가는 이미지를 그리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설명과 거리가 멉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말하니 앉은뱅이의 마음 안에서 "생겨난 믿음"이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네. 앉은뱅이에게 다가온 "믿음"이 있었고, 그는 그 믿음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come" 믿음이 왔다!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누군가에 대한 믿음은 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의 벽 앞에서 차단시켜 왔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이야기, 성령으로 충만했던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어왔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귀를 닫고 경화되어 굳어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에게 믿음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그는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2) 예수라는 이름 : 그렇다면 그 이름을 전달해준 베드로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의문이 생깁니다. 베드로는 그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예수의 이름에 대해서 무어라 고백했습니까?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시몬 베드로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다수"라는 벽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지요. 그런데 그런 신앙의 높고 낮음 속에서 그는 점점 성숙해졌던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경화, 굳어짐"입니다. 베드로는 계속되는 벽을 부수며 점점 예수에게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믿음의 성숙 속에서 앉은뱅이에게 "예수의 이름"을 소개했던 것이지요. 특히 그는 "은과 금"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예수라는 "대변혁의 원리"를 인정하라는 부름의 출발점으로써 앉은뱅이에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15-16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설명하면서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의 주"라고 설명합니다. 유일무이하게 깨끗한 생명수로써 어떤 막힌 혈관도 뚫어주는 인생의 약임을 밝히는 것이죠. 그것이 예수의 피흘림, 대속, 속죄를 말하는 것이고 베드로와 앉은뱅이는 같은 성령 안에서 한 이름을 믿어 이 기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3) 저항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 중에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신앙을 "저항"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했습니다. 특히 주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출20:11) 그래서 그에 따르는 행동으로 "일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일은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함에 따라 아담을 내치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일하는 사명"을 주시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시간과 여지를 남겨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일주일 중에 하루를 쉬게 하시어 "에덴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아담으로부터 수천년 후에 생긴 율법이지만, 인류는 타락하여 땀을 흘려야 하는 사명을 가짐과 동시에 하나님이 안식하게 해주실 것에 대한 소망도 동시게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일해야 한다는 것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도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잘 보내는 법은 "예배보러 가기"도 아니요, "헌금하기"도 아니요, "주일성수하며 돈쓰지 않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배반자임에도 불구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예배와 공동체"에서의 기쁨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불안, 초조, 염려, 분주함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예수가 한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저항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어 부활하여 승천"하였습니다. 우리의 길을 내주었습니다. 우리를 경화시키는 온갖 세속의 영향력 속에서 우리가 굳어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예수의 이름"을 기억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3. 결론
제가 네팔에 갈 때였습니다. 네팔하면 히말라야가 생각나실 겁니다. 그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오스트레일리아캠프가 있습니다. 사실 40분에서 1시간 거리면 도착할 거리입니다. 그런데 가파르다보니 굉장히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곳을 오르면서 가장 많이 물었던 것이 먼저 거기를 다녀와본 청년에게 한 질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가야해?" 그럼 그 청년이 "다왔어요 목사님"이었습니다. 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먼저 다녀왔고, 나와 같은 처지와 환경을 가져 내 입장에서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높은 곳이자 우리 모두가 가기를 원하는 천국,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가셨고 우리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다왔다 사야야"라고 알려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막다른 벽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뒤돌아 보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그 벽을 딛고 올라와 우리는 성장했다는 것을 말이죠. 그 벽을 딛고 올라올 때 때때로 우리는 남을 짓밟고, 주변인에게 상처주며, 오로지 나의 성장을 위해서 올랐던 것을 기억합니다. 때때로 그 벽을 넘지 못해 슬럼프에 빠지거나 자포자기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예수의 이름"으로 오를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다른 이름은 우리를 이해해줄 수도 또 공감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부르며, 예수가 우리 안에서 주는 확신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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