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오늘도 명예로운 삶으로 초대해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은 19장입니다. 예수님이 환경과 배경을 바꾸어 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1-2절입니다. "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공동체장이라고 불리우던 18장 말씀을 마치시고, 유대지역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중부지방으로 향하십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이 있는 곳의 맞은편으로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의 근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수난을 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오셨습니다. 점점 죽어야 하는 장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길로 나아가시는 길입니다. 그 길 속에서도 가르침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번에는 부부관계에 대한 가르침인데, 바리새인들이 먼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태는 이들의 의도가 잘못되어 있는 것임을 밝힙니다. 이들의 질문 자체에 모순이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는 상황"을 전제해두고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발점부터 다시 잡으십니다. 4-6절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우리는 결혼이 우리의 의지와 감정에 의해서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부부를 통해서 태어난 아이 또한 부부로 인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그 부부가 만나야 하기에, 그 부부가 만나게 됨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부부로 만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 속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 결정과 신비하게 연합되어 함께 일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칼로 무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한 연합"이라는 교리 안에서 생각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사시는 것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와 같이 말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부부라는 관계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결코 스스로 함부로 나눌 수 없음에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어떤 상황에 이혼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 진중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이혼이 불가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7-9절입니다.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그들의 덫에 예수님이 걸리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혼을 허용하는 예외조항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모세가 틀린 것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가 참으로 민감하고 현실과 괴리감이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교회에서도 수 많은 가정들이 이혼의 아픔에 있고, 깨어진 가정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작정 하나님의 뜻은 이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깨어진 가정을 어떻게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는지 설명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결혼이 나의 신앙과 믿음의 부족함으로 깨어지는듯이 교회는 가르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나 현대 기독교 안에서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높은 기준과 낮은 수준의 현실의 괴리감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덫에 걸리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십니까? 8절에 보니 "너희 마음의 완악함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이혼규정을 만든 것은, 성인남성이 너무나도 우월적인 태도를 가지고 아내를 버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사사로이 이혼하지 말고 이혼할 것이면 법정에 나와서 판결을 받고 이혼하라는 모세의 의도였습니다. 즉 아내의 음행보다도 남편들의 제멋대로의 판단을 막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혼한 대상자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이혼할 수 있게끔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 온 이스라엘 전체의 완악함때문이라고 질타하십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려는 사회가 결혼까지 자신의 정욕대로 하니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말씀교사들은 이런 문화를 고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모세의 이혼증서 규례를 악용하여 이혼사유조항을 더 넓혀 이혼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그래서 아내와 여성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게끔 허용한 것이지요. 이것을 이혼한 당사자만의 문제라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가르침을 허용해 온 사회주류와 말씀교사들의 완악함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결혼이 깨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남녀가 함께 결합하여 유일한 생명의 통로인 출산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키워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결혼이 깨어질 유일한 하나의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를 낳을 수 없게 다른 이성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이성에게 간 당사자의 잘못을 분명히 하고 있기에 예수님은 "음행했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근본적이 해결책은 이렇게 되게끔 만들어놓은 공동체의 완악함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고, 이 책임에서 바리새인이 피해가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이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예수님께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이 대화를 이어갑니다.
10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11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12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제자들은 이렇게 불행한 결혼생활을 할 바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냐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성인남성의 지위 안에서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하니 결혼하지 않는게 더 좋겠구나라는 사고의 흐름으로까지 갑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그 뜻과 의미를 다 잊어버리고 말이죠. 하나님의 뜻이 결혼하는 것인데, 그 결혼을 피할 자는 하나님께서 미리 그러한 마음을 주셔서 태생적 결함, 거세나 자발적인 금욕생활을 이어가는 자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지 자신의 판단으로 마음대로 결혼을 하고 말고를 "신앙을 가진 자"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조차도 얼마나 자기 중심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의미심장하게 결혼의 가장 중대한 결과물인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13-15절입니다.
1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4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그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이요 계획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위에서 언급드린 바와 같이 지극히 성인남성 중심의 문화는 결국 여성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하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에서 제자들이 장가들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라고 말한 것이나 아이들을 꾸짖는 모습을 보아도 이들이 아직도 얼마나 천국을 오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맞이해주시며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믿음과 당연히 섬기고자 하는 자, 하나님의 계획으로 살아가는 자의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며 안수해주십니다. 자기 중심으로 아내를 마음대로 버려왔던 유대사회 성인 남성, 결혼 안에서 다른 이성으로 향하며 간음하는 남녀, 이럴 바에는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게 더 낫겠다고 멋대로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무시하는 제자들, 하나님의 계획으로 태어난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기도받지 못하도록 막는 또 다른 제자들. 얼마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무시하고 있었는지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앙연수와 상관없이, 직분과 상관없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왜곡하고 잊어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명예로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생을 주심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발걸음과 인생, 가르침을 따라 사는 오늘 하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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