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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H/칼럼_H

다시 세우는 복음

by 우루사야 2026. 9. 25.

* 들어가며

말이 항상 바뀌는 사람과 일하는 것은 참 피곤합니다. 그 때마다 바뀌는 인식때문에 과거를 들추고 서로 합의했던 내용을 재검토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히 우리의 과거를 살펴보면 이것은 모두 우리가 해왔던 일인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언어는 항상 변하고 있기에, 때로는 소멸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의 협의, 조율, 약조, 계약 등은 점점 명료해지기보다는 비대해지다 못해 과도하게 세밀해지고, 결국 언어가 오히려 사람을 묶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의 인식이 항상 불안정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이에 따라 자크 데리다는 탈구조화 시대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보완으로 
타자, 반복, 문맥을 언급합니다.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며, 관습적으로 반복 가능한 가능성 속에서 의미를 유지하고 소통 때마다 서로 조율해 나가는 역동적 과정을 겪을 때,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서로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언어의 해체를 위함이 아닌 재구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기독교에게도 적용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70~80년대 미국에서 유입된 복음주의는 역동적인 한국근현대사와 만났고 유래없는 기독교 부흥사를 거치며 엄청난 격동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 한국에서 복음주의는 근본·보수주의 기독교의 반대편에서 진보적인 기독교를 품는 진영주의 용어로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역동적인 한국기독교가 과연 성숙하게 발전해 왔는가라는 질문에 느긋하게 "예"라고는 답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은 꼴입니다. 과연 복음이라는 단어를 잘 지켜왔는가에 대해서 쉽게 답할 순 없는 것이죠. 그 밖에도 기독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극단적이고 과격한 전도자들의 전유물로 빼앗겨 버렸고, 새하늘 새땅, 하나님의 교회, 안식일, 성령이라는 단어는 후천적 맥락 속에서 교단 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사용가치까지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과연 한국기독교는 자신의 것들을 잘 지켜왔을까요. 오히려 빼앗기고 더럽혀지고 세상에 짓밟혀도 아무것도 못하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복음과 교회라는 단어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격동에 세월을 겪으며 들러붙은 쓸데없는 외피들을 벗겨내고, 본래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입니다. 데리다의 해체가 '재구성'을 위했던 것처럼 말이죠. 특히 복음의 위치와 교회의 역할을 제자리로 복원시켜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곧 복음과 복음을 품고있는 교회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 뒤 재구성으로서의 몇가지 안들은 좋은 인사이트가 되는듯 합니다. 


1. 타자성의 승인과 환대

상대방의 말이 내 뜻과 완전히 같아질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의 시작입니다.하지만 타자성을 단순히 수평적인 관계로만 이해한다면 다원주의를 피할 수 없습니다. WCC(세계교회협의회)가 보여주는 탈종교화로의 내리막길을 걸을 수 밖에 없죠. 오히려 현대 복음 운동에 필요한 것은 수직적인 타자성의 이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관계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다시금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복음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과정은 언제나 불완전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복음을 내팽개치고 갈취하려 했고, 모세는 복음을 자신의 의로 뛰어넘으려다 영광을 훼손했으며, 다윗은 복음을 잃어버리고 성령의 소멸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복음을 대가와 교환하려 했지요.
이처럼 복음을 앞에 두고도 미숙한 이해를 넘어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우리의 타자성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데리다는 인간의 한계를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직접 하나님의 영이자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사, 각 사람이 복음을 이해하는 기준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도록 하셨습니다.



2. 반복가능성과 인용

말은 사용할 때마다 그 의미가 미묘하게 변하고 오염되기 마련이지만, 관습적인 반복은 사회적 소통기능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개신교는 19세기 말에 쓰였던 '하눌님'이라는 표현을 가져와 성경 번역과 신앙고백문에 이어 현대 CCM과 예배에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이유는, 한국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고 가르치기에 열과 성을 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애국가를 부를 때 '하느님'이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아이들을 신앙의 기로에 매번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지혜의 근본으로 여기는 "과정"이 중요하겠죠. 그것이 바로 반복과 인용의 중요성이라 생각합니다. 설교에서, 성경 공부에서, 가정 예배에서, 나눔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알아가는 과정과 맥락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이 더 하나님이 되어 가는 성화의 반복과 인용으로, 우리는 반석 위에 굳건한 신앙을 쌓아 갈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과거의 의미를 흉내 내는 후대의 사용으로서 언어를 말했지만, 기독교는 계시의 확장과 점진, 성취라는 보완을 뛰어넘어 주제척인 운동성을 강조합니다. 때문에 발화자든 청취자든, 남녀노소든, 누구든 말을 변질시킬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가 복음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 사실과 관계 속에서 온전하고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라는 미래성이라는 불완전한 시간적 맥락 속에서도 더 확고해지는 복음 안에서의 자아를 경험하게 됩니다. 



3. 문맥의 끊임없는 재구성

데리다는 언어란 언제든지 미끄러지고 어긋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불통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아 다르고 어 다른' 우리말에서는 유독 그 현상이 심한 것 같습니다. 스레드나 X같은 플랫폼에서는 맞춤법 하나로 본래의 의제와 글의 요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국회나 토론장에서도 이런 현상은 유독 두드러집니다. 한자라는 축약언어문화권임과 동시에 한글이 가지는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가진 우리의 언어환경이 가지는 부작용이겠죠. 그렇기에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합니다. 아니, 문맥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화자의 표정, 몸짓, TPO(시간·장소·상황)까지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을 압도하여 문맥에서 끊어진 채 독립적인 재구성을 시도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박진영 씨가 보여준 신학적 행보는 큰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자신의 현재적 이해에 따라 삼위일체를 인식하고자 한 나머지, 탈구조화를 넘어 극히 지엽적인 해석을 꺼내놓고 그것을 감리교와 웨슬리의 맥락에 억지로 연결하려 했습니다. 감리교단의 많은 분이 분통을 터뜨리는 코멘트를 읽으며, 만약 그가 칼빈주의 라인과 연결 지으려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팀 켈러와 존 파이퍼를 향한 잠깐의 언급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지만, 그의 비판은 더 좋은 분들의 영상으로 갈음합니다. 저는 다른 관점에 서보고자 합니다. 

그의 신학이 위함헌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독립적 재구성"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구조화 시대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로, 기존과 주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성을 보입니다. 본질과 전통, 맥락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인식과 존재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인지구조의 소산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주류 기독교와 기성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있었다면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진영 씨가 복음을 독립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 자체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저는 개인적으로 전광훈의 신성모독보다 이것이 더 심각하다고 봅니다), 그런 현상 앞에서 주류요 본질을 말해왔다고 하는 기성기독교로서의 반성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성 교회가 '교회'라는 본질적 의미를 스스로 독립적으로 재구성하며 각기 제 길로 가려는 흐름을 방치했기에, 박진영 씨의 시도가 이토록 손쉽게 대중이라는 바다에 배를 띄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문하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위치를 우리가 상실했기에, 우리는 지금도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엇나간 교리의 난무를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봅니다.

 4. 복음을 복음답게

그렇다면 박진영씨와 그의 첫열매들모임(도저히 교회라고는 못부르겠습니다)을 비판하는 것에서만 그칠 수는 없습니다. 주류기독교이자 기성기독교 속에서 변질된 복음의 본래 위치와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그것은 복음의 본질에서 가능합니다. 데리다의 생각을 빌려봅니다. 말의 회복은 타자라는 관계 위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지속적인 반복이 주요합니다. 그리고 그 반복은 고여있는 물을 위함이 아닌 정화와 깨끗함으로의 발로입니다. 현대 한국기독교의 교회가 어떤모습이어야 하는가보다 복음을 어떻게 다루는 그릇이어야 하는가라는 전제와 질문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지 결코 목사나 중직자, 주요프로그램이 복음을 대체할 순 없습니다. 복음을 계속 반복하면서 성도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적용가능한 복음이 무엇인가 함께 고찰하고 살아내며 온전한 복음적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예배당으로 설명될 순 없습니다. 다만 예배당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일을 이룸을 확인한 신자들이 매주 모일 수 있는 중점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단절되어 현재의 위치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 자신의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교회의 중심역할자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죠. 예배당이 없거나 십자가 없거나 부교역자가 없는 것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지, 결코 교회다움의 필수는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수직적 관계 속에서 타자를 인정하게 되고, 반복되는 교제를 통해 구속됨을 자신의 삶에 인용하여 복음으로 온전하게 되는 자신의 삶을 확인하며, 마침내 개인적인 과거와 미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일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연결해내는, 그래서 돌아온 한 양이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어 저 천국에서 나팔부는 잔치가 열리게 되는 복음의 확장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일 것입니다. 
 

5. 현재의 교회

제 나이가 40대에 이르니 주변의 많은 목사님들과 교회 개척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주제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현대에 맞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이며, 현대 성도에게 맞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투영시킬 수 있는 예전은 어떤 형태여야 할까? 수많은 질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지금도 그분이 일하고 계시며, 마침내 그분이 계획하신 일을 원하시는 모습으로 기필코 이루어내실 것이라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타자화된 위치에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이 행하시는 일의 맥락과 끊임없이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 부르짖음, 그리고 매일의 일상. 그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과 교회가 참된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목격하는 예기치 못한 기쁨에 환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개척 키워드에서 가장 화두인 것은 비제도권 교회입니다. 반대로 제도권 교회는 무엇일까요. 인사와 재정. 네, 자리와 돈입니다. 이는 현대에서만 드러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사도행전 초반부 6장까지 살펴보면 많은 분량에서 제도권으로서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2명의 제자를 채우고, 7명의 집사를 세웁니다. 특히 집사를 세울 때는 구제하는데 있어서 민족간의 차별때문에 있었던 일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 전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과 재정문제가 있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네, 교회는 제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모인다면 제도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다만 그 제도가 물을 고이게 하기 위함이 아닌 흘려내기 위한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12명의 사도는 스스로 사도가 된듯한 바울과 교제하며 그의 사도권을 허용하다 못해 안디옥교회에서의 활동을 바나바를 통해 그리고 베드로와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지지했지요. 제도는 있었지만 그 제도는 얼마든지 상황과 환경에 따라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물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지켜야만 했지만, 그것을 흘려내는데 있어서는 혈족이나 혈통에 고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제도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제도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보다 큰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6.  앞으로

얼마 전에 사임을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러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여전히 각 교회는 복음을 전하며 사람을 살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며 하나님을 배우게 했으며, 믿음의 가정을 위해 유아세례를 베풀고, 소그룹을 일상으로 파송해 교회로 세워질 수 있도록 헌신을 격려하고 권면했습니다. 그 교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제도 안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얼마든지 교회의 풍성함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제 안에서 "규격화된 교회의 모습과 목회자의 위치"가 문제였습니다. 저 자신을 해체시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재무장해봅니다. 그렇게 교회를 향해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요1에서 등장하는 로고스는 결코 해체 될 수도 또 재구성될 수도 없겠지요. 그것을 언어요 말로 받고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신적존재로서의 로고스보다
는 제한적이며 해체가능한 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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