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넘기며 두 영화를 연달아 보게 되었습니다.
라이언일병구하기와 퓨리, 전쟁영화입니다.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연기파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죠.
미국승리영화처럼 보이지만
"참혹한 현실 앞에서의 인격"을 말하고픈
영화라는 속내가 같은 영화입니다.
2차세계대전에서는 당시 전세계인구의 3%인
8천만명이 사망했습니다. 말 그대로 인간을 갈아넣은
시기였기에, 인격실종의 시대였습니다.
후대에 와서 그 시기를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하게 되
는 것 같습니다. "그 때에도 사람이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가운데
1명의 병사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한소대가 전멸을 하고,
한 사단의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한 전차분대가 대대급을 상대합니다.
인격이 실종된 시대 속에서 인간은 인간되기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듯 합니다.
한 사람 또는 특정집단을 통해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그 어떤 조직도 구성원의 인격을 제한하다 못해 결국
죽이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이 주관적으로 조명해주시는
객관적인 십자가 구속사건과 성경이 아닌
한 목회자나 특정집단에게 주목되는 교회라면
전체주의성향을 띄기에 결국 성도의 인격을
무시하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멀리 신천지 이만희에게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찬양인도자로 손꼽히는
어떤 선교사의 사역현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
찬양팀 여성멤버들이 그 선교사의 도착에 발맞춰
주름치마를 휘날리며 뛰쳐나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15여년 전이지만 북한에 온 듯한 충격적 장면이기에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자유가 수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 인격의 보호를
위함입니다. 라이언일병구하기와 퓨리에서 등장하는
미군이 이 땅 한반도에서 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4.5만명이나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땅에는 한 사람의 인격을 전체를
위해 갈아넣는 현장이 곳곳에서 펼쳐집니다.
어김없이 제주항공 무안공항 유가족들에게
비인간적인 위해가 가해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이들이 비난과 모욕을
일삼다 못해 유가족들에게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정치도파민"에 빠진 극단주의자,
전체주의자들은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넘쳐나는 뉴스에 저까지 정치뉴스를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영적세계와 사탄을 운운하며
성도들을 동원하며 영혼을 갈아넣고 있는 것을 보며
참지 못하겠습니다.
라이언일병구하기에서 톰 행크스가 열연한
존 밀러 대위는 자신의 직업이
교사인 것을 숨기고 승리를 향해 전장을 누빕니다.
퓨리에서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워대디는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승리만을 향해 나아가는 차가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들은 사이사이에 누구도
인간이 인간됨을 포기할 수도 버릴 수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참혹한 전장,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살 수 있는 그 현장임에도 조연들의 서사가 등장하고
주인공들이 숨어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독일군도 연민을 느낀다는 포인트도 삽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도파민에 빠진 이들에게는
이 독일군보다도 연민이 없는듯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2:24-25)
한동안 게시물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가을과 겨울에 지역주민을 초청해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말 여기저기에 이런 일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올리지 않았던 이유는
제 안에 있던 "사람이길 포기하려는 욕망"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며 섬기며 높여주는 사역은
저절로 좋은 결실로 이어지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실이 많아지니 귀한 줄 모르는 시점이 오더군요.
그 열매들이 "일"로 보여지기 시작했고,
피곤해지기 시작했고 힘들고 귀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올해 첫주 주일부터
젊은이예배를 열게 되었습니다.
구색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여기저기서 인원을 구해 "예배다운 예배"를 만들기
시작하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구색"에 초점을 맞추니
말 그대로 일을 하고 있었더군요.
예배를 세운다는 기쁨이 아니라 긴장과 초조로 가득했습니다.
이건 아니다싶어 그 구색을 다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예배의 형식도 갖추지 않기로 했습니다.
10명이 채 안되는 상황에 구색을 갖추는 것이야 말로
청중을 도구로 삼는 일인 것을
"작은교회 사역자"들을 잘 알 것 입니다.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격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섬김과 사랑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인원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임을 서로 알아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 여유를
주님께 구해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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