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사야 2025. 6. 22. 02:12

제목 : 아버지를 믿사오며
본문 : 눅5:1-11

1. 서론

1) 예화
갤럭시 광고의 한 장면입니다. 한 여성이 야심한 밤에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조깅을 하다가 마주친 한 남성과 인사를 합니다. 유럽인들은 이 광고를 보고 삼성이 여성안전에 대해 둔감하다고 평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런 반응이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까요. 이런 이슈가 현실에서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 소송전이 일어났습니다. 한 엄마가 아기가 탄 유모차를 카페 앞 실외에 세워두고 안에서 한시간 이상 커피를 마십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주변인으로부터 “아동방치로 인한 학대”로 신고를 받게 되어, 결국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이 엄마는 핀란드 출신으로 그곳에서는 모두 이렇게 하기 때문이었죠. 믿음이 없는 사회는 신뢰가 바탕이 되는 사회구성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네, 믿음이 없으면 믿음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없고 더 나아가 왜곡하고 폄하하기까지 합니다. 믿음이란 건 이렇습니다.

2) 주제
신약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할 때 “믿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죠. 하지만 구약에서는 믿는다는 표현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알다-야다 히브리어인데 마음을 쓰다, 깊숙히 관계하다, 성관계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지적 차원이 아닌 “경험적이고 체험적 단어”죠. 네, 성경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이해하고 깊숙히 관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 단어를 신약에서 믿음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생활은 결코 지식을 받는 것으로 충족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교는 “가르칠 교”입니다. 더 나아가 삶을 전하는 “모임 회”여야 합니다.

3) 본론잇기
그런 점에서 오늘 함께 읽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건이 유익하다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설교를 잘 하는 유명한 선생님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계기를 통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적존재로 고백하게 됩니다. 네, 예수에게서 저 멀찌감치 떨어져 적당한 거리에 있던 사람에서 그 무엇보다도 제 일순위로 예수를 따르게 되었던 제자가 된 것이죠. 그 정점, 분기점, 변곡점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래서 내가 신앙인으로서 어떤 길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시죠.

2 . 본론

1) 예수를 알아가기
예수님이 베드로와 만나는 배경부터 살펴보시죠. 2절에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는다는 것은 조업이 끝났다는 걸 말하죠.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모순적 상황을 일부러 만드십니다. 첫번째, 베드로의 배에 오르십니다. 두번째, 배를 띄우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조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싶지만 설교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제 드디어 설교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셋번째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고 하십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베드로의 하루일과였습니다. 5절에 보니 “밤새 조업을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한 실패한 날”이었던 겁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이런 행동들은 정말 최악이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성격과 성미가 급하고 불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보이는 베드로는 굉장히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좋은 사람같아 보입니다. 2절에서 배가 두척이 있다는 사실은 고대에서 어느정도 재력이 있으며, 또 베드로가 다른 어부들을 이끌고 가는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봐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큰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베드로가 가진 재력, 리더십, 인성이 드러난 이 순간이 예수님의 제자로 통과된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마지막으로 가장 모순적인 말씀,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평생 바닷가 사람으로 고기를 잡으며 집안을 일으킨 베드로입니다. 동생들까지도 어부인지라 베드로는 맏형으로써 가장 전문가 중에 전문가입니다. 그런 그가 조업에 실패했는데, 목수집안 출신에 점잖은 선생님이 집어준 포인트에서 물고기가 이렇게 많이 잡히다니요. 너무 많이 잡혀 “두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네, 이것은 평상시에 만선을 이룬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기이한 상황”입니다. 베드로와 그 주변인들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모순 중의 모순인 상황입니다. 이 모순과 신비로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한 베드로가 한 말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네, 감당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생활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것은 선생으로서 예수를 향한 인내와 선한 성품, 또는 일상에서의 리더십, 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모순으로 꼬인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엄청난 신비함으로 감당이 안되는 하나님 중 어디에 나의 기대를 둘 것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입으로 주님이 떠나기를 요청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몸을 움직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배에 오르고, 거기서 설교도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모순된 내 삶에 개입하신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 알아가는 예수
그럼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서 물리적인 만남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방식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순의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순을 신비로 바꾸시는 역설적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눈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믿음은 “모순된 내 삶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나 봅니다. 이 모순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로 변화시키시는지 경험케 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생활, 교회생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온다던지, 헌금을 한다던지, 목사님이 하자고 하는 것에 따른다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무리한 부탁들을 계속해서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퇴근하고나서 수요예배가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없는 돈 쪼개서 헌금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휴가 때 선교를 떠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것 같은 내 현실과 마음, 사고 속에서 하나님이 역설적으로 나를 가르치시고 만나시고 경험케 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시작과 기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또 살아내면서 우린 믿음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죠.

마태복음 25장에는 오른쪽 양과 왼쪽 염소 비유가 나옵니다. 이걸 두고 양이 얼마나 순하고 염소가 얼마나 괴팍한지, 그래서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믿음을 살아냈는가”에 있습니다. 이 심판대에서 재판장은 “약자와의 삶”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즉 예수가 낮아져서 섬기는 인생을 믿고 너희도 그렇게 살아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정리하게 될 믿음은 “살아낸 현실”이지, 결코 교회에 쏟아부은 나의 노력이 아닙니다.

네, 믿음생활은 말 그대로 “라이프스타일”, 우리의 삶 그자체입니다. 내가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반평생을 함께 살다보면 부모의 모습이 나에게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다보면 어느샌가 내가 예수처럼 행동하고 양심에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이렇게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는 이 실재적이고 실존적인 믿음생활의 나눔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흥에 취해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 모순된 삶 속에서 살아움직이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감격스러워 박수가 절로 나오고 소리가 높아지고 저절로 예배가 되는 것이고 소그룹에서 그런 나눔이 이뤄지는 것이죠. 



3) 적용
요즘 계속해서 지역사회사역과 나눔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많이 고되긴 하지만 기부빵을 어떻게든 적당하게 쪼개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에서 만나려고 합니다. 또 교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지역사회로 연결짓기 위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신자들도 만나게 되고 관공서도 함께 대화하게 되더군요.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또는 순탄하게 결정되어질 것들이 더디기도 하고 또 저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당근어플이 제 계정을 제재할 때는 정말 막막하더군요. 그러다보니 ‘돈도 안되고 교회의 유익도 안되는 이 일을 꼭 해야되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군요. 하지만 저에게 하나님은 계속 이 사역을 이어나가게 하셨고, 마침내 “낮아지면 높아지리라”는 전능함으로 천지를 만들어 그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경험케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또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것은 광진구 11개 교회와 성당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예배당 안에서 행사가 이뤄지다보니 교회행사 지원금처럼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라 이 돈은 교회행사가 아니라 지역주민을 위한 것이니 지역을 섬기기 위해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놀이터에서 하게 되었고 또 비용 전부를 음악회를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청천벽력, 비가 오는데 부슬비가 아니라 물이 고여 소파, 무대, 게스트가 다 젖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행사는 2시간을 준비했지만 1시간으로 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대했던 인원은 사람들이 놀이터에 꽉차서 서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략 40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광진구청에서 이 행사가 가장 취지에 맞는 행사라는 피드백과 내년계획까지 말한 것이었고, 또 지역주민들의 감사와 격려였습니다. 이런 무대를 마련해준 것이 고맙다고 말이죠. 저는 돈이나 명예로 높아지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정말 다른 신비함으로 높이시고 또 제 안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렇게 모순된 제 마음이 “낮아지면 높아지리라”는 역설의 진리로 신비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세상을 섬겨 죽으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높아지신 것처럼 말이죠. 저는 그렇게 경험하고 만난 하나님으로 다시 한번 섬기러 또 나아갈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말이죠.

3. 결론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들어 그 사이에 우리를 두신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이 믿음은 “그렇게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냈느냐”라고 묻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자요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이 믿음이라는 구심점을 가지고 라이프스타일과 루틴, 삶의 방향을 꾸려나간다는 것은 세상이 볼 때 모순입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낮아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높여 세상을 향해 “이것이 정답이다! 의로움이다! 빛과 소금이다!”라고 말하십니다. 예수가 그렇게 이 땅에 오셨고,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를 따라 나서듯이,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바라보며 오늘도 이번 한주도 어김없이 묵묵히 낮아지러 나아갑시다.